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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위악이 가득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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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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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선하고 따뜻한데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만 나서면 사나운 사람들뿐이다. 온라인 언론 보도나 각종 사회관계망 매체의 댓글들에는, 직접 만나서는 도저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말들이 넘쳐난다. 약자를 더욱 잔인하게 짓밟고 힘의 논리를 대놓고 옹호하는 말들이 솔직함을 명분으로 마구 던져진다. 대개는 누군가의 가족이고 평범한 사회관계를 지속하는 사람들일 텐데 자신이 괴물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폭언을 일삼는다. 실제보다 과도하게 악한 척을 하는 위악(僞惡)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악이라는 말은 전통시대의 한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일 뿐 현대중국어에도 등재되지 않은 단어다. 선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 위선을 하면 했지 위악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헤어지는 연인의 행복을 위해 일부러 악한 언행을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나 더 큰 대의를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매력적인 히어로 등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익숙하긴 하지만,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약자가 택할 수 있는 자기방어 혹은 책임회피의 왜곡된 몸짓인 경우가 더 많다.

위선이 선을 가장한 악이니 그 반대말인 위악은 악을 가장한 선이 되는 것일까? 위선이 선이 아니듯이 위악 역시 당연히 선이 아니다. 내면은 그렇지 않으면서 남에게 잘 보이려 행하는 위선이든,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해 과장되게 행하는 위악이든,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을 기준으로 삼는 거짓된 양태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런 행동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스스로마저 속게 되어서, 주어진 상황이 대개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감염증이 만들어낸 비대면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면서 익명의 보호막 역시 더 두꺼워지고 있다. 만나서 표정 보며 이야기하면 금세 이해될 일들마저 과도한 비판의 도마에 올라 난도질당하기 십상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답답함과 분노들이 누군가에 대한 정죄와 공격으로 치달리는 가운데, 정치와 언론마저 마치 위악의 경연장을 펼쳐놓는 것처럼 기름을 붓고 있다. 이 시끄러운 시대를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 그저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뿐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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