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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최유식의 온차이나] 중국 경제 부총리의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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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일보 기고문에서 “공동 부유 한다고 부자 털어 빈민 구제하고, 가난하게 만들면 안돼”

과학기술 혁신 통해 한국ㆍ이스라엘 길 걸어야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 겸 공산당 정치국원이 11월24일 자 인민일보 6면에 쓴 ‘반드시 고품질 발전을 실현해야 한다’는 제목의 글이 요즘 화제입니다.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글이 많죠. 중국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글도 보기 힘듭니다.

류허의 글은 달랐어요.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질적 성장을 이뤄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냉정하게 짚었습니다. 현단계 중국 경제에 대한 반성문 격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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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허 중국 경제 담당 부총리.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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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털어 빈민 구제하는 식 안돼”

인상적인 부분은 시진핑 주석의 정치 강령인 ‘공동 부유’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류허는 “공동 부유를 위해서도 질적 성장이 필수적”이라면서 “평균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부자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거나 부자를 털어 가난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며, 복지주의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세금 걷어 나눠주는 식이 아니라 인적 자원 개발과 생산성 향상,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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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11월24일 자 6면에 실린 류허 부총리의 글. /인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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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작년부터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을 비롯해 부동산·IT 분야의 민영 기업가들을 대대적으로 손보고 있죠. 올해는 부동산 보유세 시범 도입도 결정했습니다. ‘공동 부유’를 내건 시진핑식 좌경 노선이 점점 더 강화되는 흐름이죠.

지난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온 3차 역사 결의에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대한 언급이 크게 줄어 중국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과거 경제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류허의 글은 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중국 기업 덩치, 세계 일류와 큰 차이”

중국 기업에 대한 평가도 냉정합니다. “포천 글로벌 500에 들어간 중국 기업 숫자가 2년 연속 세계 1위였지만, 중국 기업은 크기만 할 뿐 혁신 능력이나 국제 경쟁력 면에서 세계 일류 기업과 큰 차이가 있다”고 했어요.

덩치 큰 기업은 대부분 국유기업이죠. 시진핑 주석은 집권 이후 과거 개혁 대상이었던 국유기업에 다시 힘을 실어주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간 거죠.

류허는 “질적 성장의 기초는 경쟁력 있는 기업”이라면서 좋은 시장 환경을 조성해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고, 시장 시스템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회적으로 민영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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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상위 10대 기업. 중국 국유기업 3곳이 포함돼 있다.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중국 기업은 총 143곳으로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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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가 공업화를 통해 단기간에 중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중진국 함정을 넘어 선진국이 된 국가는 한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등 소수에 불과하다고 했어요. 중국이 이런 나라들처럼 국제 분업 체계의 상단으로 올라가려면 노동생산성과 과학기술 기여도, 인력 자원 수준 등을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과학기술 혁신은 단순한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도 썼는데,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미국의 반도체 제재로 중국 기업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겁니다.

◇시 주석 뒤치다꺼리 나섰나

류허는 시진핑 주석과 같은 태자당(중국 고위관료, 혁명 원로 자제 그룹)의 일원으로 중학교 시절 시 주석의 친구였습니다. 2012년 시 주석 집권 뒤에는 그의 경제 책사로서 시코노믹스를 설계했죠.

그런 그가 시 주석의 경제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듯한 내용을 당 기관지에 실은 배경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옵니다. 시 주석의 과속 질주에 불안해하는 민영 기업가와 외국 투자자들을 다독이고 안심시키기 위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아요. 류허가 시 주석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도 고도성장의 후유증으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죠. 시 주석의 공동 부유 구호는 이런 배경하에서 나왔습니다. 국내 대중을 의식한 측면이 강하죠.

그렇다고 중국이 세계 경제와 단절하고 시장 경제에서 이탈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류허가 틈만 나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죠. 하지만 류허의 말은 그냥 말일 뿐, 시 주석이 쉽게 바뀌겠느냐고 보는 시각도 적잖습니다.

[최유식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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