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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제주에서 태어난 길벗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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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말고] 이나연ㅣ제주도립미술관장

하늘의 무지개를 마주하면 가슴이 뛴다, 어린 시절에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엔 죽는 게 낫다.(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

무지개는 예쁘다. 알록달록하고, 신비롭고, 아주 가끔씩 등장해서 희귀한 매력까지 있다. 그래서일까, 워즈워스의 시처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발견하면 놓칠세라 허겁지겁 카메라를 찾게 된다. 이 무지개를 성소수자의 상징으로 만든 디자이너가 있다. 6색 무지개 깃발을 만든 길버트 베이커다. 엘지비티(LGBT)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1970년대부터 사용된 무지개 깃발은 이제 인권과 평등, 다양성을 상징하며 전세계적으로 사용된다. 무지개색을 보면 가슴이 뛰는 또 다른 이유가 됐다.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며 만든 영문 서체가 있다. 동성애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길버트의 정신을 기리며 무지개색으로 만들어진 ‘길버트체’다. 그리고 이 영문 폰트를 한글 폰트로 만든 이들도 있다. 제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제주사람’인, 제람 강영훈 작가가 서체 디자이너인 숲 배성우와 함께 협업해서 만들어낸 서체인 ‘길벗체’ 얘기다. 길벗체 개발 취지를 보면 “자긍심의 무지개에 담긴 뜻과 꼴을 계승하며, 연대의 의미를 담아 길버트체의 구조와 형식을 따른”다. 무료로 다운받아 누구나 쓸 수 있는 서체이기도 하다.

하반기 미술관의 가장 큰 행사인 프로젝트 제주의 공식 서체를 길벗체로 정했다. 동시대 제주의 다양성을 미술관이 품는다는 취지에 가장 맞춤한 서체였다. 그리고 어떻게 디자인을 해도 아름다운 서체이기도 하다. 이 멋진 서체를 만든 동력이 제주에서 시작됐다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고, 본인의 정체성을 늘 제주에 두는 제람의 시각적인 활동 면면도 흥미로웠다. 길벗체로 시작한 인연은 전시로도 이어져서, 연계전시를 하는 국제평화센터에서는 <유 컴 인, 위 컴 아웃―레터스 프롬 어사일럼>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기회가 됐다. 망명, 혹은 정신병원을 뜻하는 어사일럼에서 온 편지에는 군 복무 중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정신병원에 갇혔던 제람 자신의 경험담을 포함한 6명의 동성애자 군인의 이야기를 거울에 편지 혹은 증언을 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사람 키를 넘는 벽 구조물에 먹색으로 쓰인 글은 1998년의 경험도 있고 2017년의 것도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해는 반복됐고, 아마 현재진행형이리라 짐작한다. 벽에 쓰인 텍스트를 읽기 위해선 작은 공간을 만들어낸 구조물 속으로 들어가 고개를 들거나 조금 걷거나 무릎을 굽히는 등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는 동안 글을 읽는 내 모습이 거울에 반사된다. 물리적인 움직임이나 반사되는 내 모습을 확인하면서 텍스트 속 주인공이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경험을 한다.

제람 작가의 역사는 소수자의 역사이기도 하다. 4·3 생존자였던 할머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군대 내 동성애자 탄압으로 정신병원에 간 경험부터 영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간 내용까지 이른다. 소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이는 이제 소수자를 대변하는 시각예술활동으로 목소리를 낸다. 난민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와 성폭력 피해자까지, 소수자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이웃으로부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이제 다양성의 상징이 된 길벗체는 기후위기를 말하는 언어도 되고, 장애인 인권을 말하는 언어로도 확장된다고 한다. 어디서든 길벗체를 만나면 무지개를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알록달록 무지개색은 언제나 예쁘고, 무지개색 길벗체는 더 곱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보이는 깊은 의미는 아마 앞으로도 평생 길벗체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뛰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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