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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회빙환 세계에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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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웹소설 플랫폼에 올라온 웹소설 소개 화면. ‘네이버 시리즈’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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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이승준ㅣ이슈팀장

‘오늘도 애를 쓴다고 썼는데….’ 하루를 마감하고 누울 때마다 되감을 수 없는 일들을 되감느라 쉽게 잠들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휴대전화 웹소설 앱을 실행시킨다. 뒤숭숭한 머릿속을 비우는 현실도피다.

웹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어리둥절했다. 만화나 판타지, 추리 소설 등 장르물에 한참 빠졌던 10대(1990년대) 이후 공백 때문일까. 작품 세계가 너무 달랐다. 웹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오랜 시간 모험을 하고 성장하며 점차 강해지는 서사를 찾기 어렵다. ‘회빙환’ 세계관이 웹소설을 지배한 지 오래다. 회빙환은 회귀·빙의·환생의 앞글자를 딴 조어로, 웹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바꾼다거나(회귀), 결말을 알고 있는 판타지 소설 속의 조연이 된다거나(빙의), 평소 동경하던 능력을 갖춘 인물로 태어나는(환생) 등 회빙환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주된 독자가 20~30대라서 그런지 회빙환 설정에 롤플레잉 게임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 많다.

“부상 이후, 촉망받던 야구 유망주에서 팀의 골칫거리로 전락해버린 이진호. 깨어나 보니 고교 마운드에 서 있다? 이번 회차는 꼭 롱런하고 말리라!”(<캬! 이 맛에 투수 한다!> 작품 소개) 작품 소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소 황당하거나 자극적인 스토리 전개 등이 대부분이라, 한동안은 주변에 웹소설 독자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1억6천만의 누적조회수(네이버시리즈·3일 기준)를 자랑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은 인기작이 잇따라 등장하고, 수많은 작품이 웹툰·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웹소설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를 보면 2013년 100억원이던 웹소설 시장 규모는 지난해 6천억원대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환생하니 특종 기자’, ‘역대급 마감 천재’ 류의 작품은 없나’ 같은 싱거운 생각을 하며 웹소설을 즐겼다. 그러나 회빙환의 세계관이 한국 사회의 거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층 상승의 마지막 열차라며 암호화폐에 ‘영끌’한 2021년 한국 사회 청년들의 갈망을 웹소설은 예민하게 포착한다. ‘노오오오력’해도 ‘이번 생은 망했다’는 20~30대의 절망은 게임처럼 인생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웹소설에 투영된다. 대부분 주인공이 완벽한 능력을 갖춘 ‘먼치킨’(강력한 캐릭터)이고 별다른 시련 없이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사이다 전개’는 ‘금수저의 삶’에 대한 판타지로 읽힌다. 웹소설에 자주 사용되는 ‘나 혼자만~’ ‘○○○로 사는 법’ 같은 제목도 좀처럼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잊고 ‘나 혼자 폼나게 사는 법’을 꿈꾸는 이들의 마음이 포개진다. 좁은 고시원에 살며 일용직 노동을 전전하던 흙수저 대학생이 웹소설 속 유럽 중세 귀족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현실에서는 써먹지 못할 전공 지식(토목공학)을 활용해 영지를 개발하는 이야기(<역대급 영지 설계사>)까지 접하니 웹소설을 그저 재미로만 즐길 수 없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판타지를 창조하는 웹소설 작가들도 독자들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웹소설 플랫폼에는 한달에 1만건(‘웹소설 산업현황 및 실태조사 2017’) 이상의 작품이 올라오지만 일부 성공한 작가 외에 대부분은 장시간, 저소득 노동에 시달린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의 지난해 11월 조사(331명)를 보면, 웹툰·웹소설 플랫폼 창작 노동자들 절반은 연평균 수입이 1700만원 이하인 것으로 조사됐다. 카카오·네이버 등 플랫폼이 작가 등에게 떼가는 수수료가 상당해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각 당 대선 후보들은 그 어느 때보다 2030세대의 마음을 잡겠다고 분주하다. 그러나 이들을 회빙환의 세계로 내몰았던 한국 정치가 ‘벼락치기’를 한다고 마음을 쉽게 붙잡을 수 있을까. 이들을 회빙환 없이 현실에서 꿈을 꾸게 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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