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이우진의 햇빛] 지도에 그려진 날씨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이우진ㅣ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태양이 황소자리에 놓이면 싹이 나고, 처녀자리로 옮겨 가면 수확할 때가 된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별자리 지도는 농경사회에서 풍성한 먹거리를 구하기 위한 열망의 표시였다. 콜럼버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손에 쥐고 대서양을 건넜다.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만든 지도는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도자기, 향료, 차 같은 특산품이 많았다. 동양에서 가져온 희귀한 물건들은 고가에 팔렸고 상인들은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보물을 찾으려는 경쟁은 지도를 베끼는 데서 시작했다. 네덜란드인이 포르투갈에 첩자를 보내 바스쿠 다가마의 항해 기록을 담은 여행 지도를 훔쳐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얘기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영국 사람들은 땅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공장에는 석탄이 필요했다. 지하자원을 지도에 그려 넣고 채굴에 나선 것이다.

지도 위에 날씨를 표기한 일기도가 등장한 것은 19세기부터다. 날씨도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다른 자원과 달리 날씨는 곧바로 선점한 자의 이득이 되지 않았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는 돈을 벌지만, 짚신 장수는 우울해진다. 상황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강력한 두 힘이 일진일퇴하며 우열을 가리기 힘들 때는 날씨가 한쪽 편을 들어 승부를 결정지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하자, 러시아군은 모든 것을 불사르고 후퇴하며 지연술을 폈다. 양쪽이 시간에 끌려다니는 동안 시베리아의 추운 날씨는 러시아 편을 들어주었다. 패전과 실각의 고통 후에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회심의 일전을 꾀한다. 대포의 화력을 앞세워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야전 사령관은 예정에 없던 폭우가 쏟아지는 게 야속했을 게다. 땅이 물러지면 포신이 쉽게 흔들리고, 적진에 떨어진 포탄이 진흙탕에 파묻혀 제대로 구르지 못해 파괴력이 떨어졌다. 아레스 신이 다른 편으로 기울었다는 걸 눈치채고 하늘을 원망했을 것이다. 잠시 공격의 고삐를 늦춘 사이 프로이센 지원군이 상대 진영에 합세하며 황제의 재기 꿈도 사라졌다.

때로 지도에 그려진 날씨는 목숨보다 비쌌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다. 영국은 현지 주민을 골라 지형탐사와 관측 훈련을 시켰다. 007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파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오지를 다니면서 기상 관측에 나섰다. 기도하는 데 쓰는 손 자루 대롱 안에는 기상 기록용지를 둘둘 말아 넣고, 지팡이에는 온도계를 감추었다. 이방인의 신분이 노출되거나 첩보 행각을 벌이다 발각되면 끔찍한 처벌이 뒤따랐다.

한때 석유를 찾아 나섰던 이들은 이제 지도에 바람과 햇빛을 그려 넣고 그린 에너지를 찾아 나선다. 대기는 붙잡을 수 없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금을 찾겠다고 온 산과 강을 들쑤셔놓은 것처럼 대기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온난화를 경고하는 기후 전망 지도는 더 많은 자원을 쟁취하려는 사람의 본능과 인류 전체의 파국을 면해보려는 이성 간의 극심한 온도 차를 보여준다.

지도 위에 날씨를 그리는 작업은 고단하다. 날씨는 지형과 달리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수시로 변덕스러운 기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표출된 날씨를 보면서 운전자는 교통 혼잡을 피하고자 우회로를 찾고, 비행 조종사는 전방의 폭풍우를 피해 가면서도 제트기류를 탈 수 있는 경제 항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이상기후로 곡물가가 오를 것을 염두에 두고 재고량을 늘리거나, 금융 파생상품을 구매하기도 할 것이다. 힘 있는 자가 아니라, 멀리 내다보고 많이 생각하는 자가 날씨의 부를 차지할 것이다.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