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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로부터 벽은 허물어진다…'엔젤스 인 아메리카' 신유청 연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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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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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6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극단의 신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신유청 연출.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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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막을 올린 국립극단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는 그 제목처럼 천사가 등장한다. 장장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내내 목소리로만 등장하던 천사는 연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극중 ‘프라이어’와 관객 앞에 마치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정형화된 천사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극을 연출한 신유청의 표현대로라면 “어딘가 파괴돼 있고, 물에 쫄딱 젖은 병든 독수리 같은” 형상으로 인간 앞에 나타난다. 천사는 에이즈 환자로 연인에게 버림 받은 ‘프라이어’에게 말한다. “반갑다, 예언자여. 이제 뜻이 이루어지리다. 여기 메신저가 왔다.”

작품의 배경은 새 밀레니엄을 15년 앞둔 1985년의 미국 뉴욕.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절의 극우적 분위기 속에 확산되기 시작한 에이즈 공포, 세기말적 혼란이 뒤섞인 사회를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의 극작가 토니 쿠슈너의 대표작으로 1991년 미국 초연 당시 퓰리처상과 토니상 등을 석권했다. 국내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은 초연 후 30년 만에 처음이다. 연극 <와이프> <그을린 사랑> <빈센트 리버> 등으로 주목받은 연출가 신유청이 키를 잡았다. 지난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신 연출은 이 작품을 “담대한 희곡”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희곡을 접했을 때 “<그을린 사랑>의 메시지와 연장선상에 있는, 다음 스텝을 밟는 느낌이었다”는 그는 이 연극을 “누구나 마음 속에 갖고 있는 편견이란 장벽에 용감하게 맞서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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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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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세기말적 분위기로 가득하고, 또한 묵시록적이다. 대서양을 건너 낯선 땅 미국에 당도한 이방인의 후예들은 저마다 불안과 공포에 가득차 있다. 그런 그들 앞에 환영과 소리의 형태로 그들의 조상이, 환상 속 어떤 존재가, 유령과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고 또 사라진다. ‘신의 메신저’ 천사는 비뚤어지고 기울어진 세계의 “거대한 거짓과 오류”를 바로잡을 것을 예언한다. 당시 개신교에서 ‘신의 응징’으로 여겼던 에이즈 환자이자 개신교도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던 동성애자 프라이어가 예언자로 선택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주간지 타임은 초연 당시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대담한, 그러나 동시에 가장 위험한 동성애 연극”이라고 평했다. 신 연출은 원작자인 토니 쿠슈너가 유대인이라는 점(동시에 동성애자였다)에 주목했고, 성서의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해석했다고 한다. “성서라는 완벽한 턴테이블 위에 1980년대의 미국 시대 상황을, <엔젤스 인 아메리카>라는 LP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그 연주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원작을 읽었다는 그는 “특정 종교의 시선이 아니라, 성서라는 텍스트와 신학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들여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국) 초연 당시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에도, 무신론자에게도 모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작품이었겠다 싶었어요. 타인에 대한 비난, 혐오 섞인 시선은 내 마음 안의 어떤 장벽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누군가에겐 그것이 인종이나 정치적 성향일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에도 여러 장벽과 편견이 존재하죠.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끝에 가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내 안의 장벽을 제거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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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신유청 연출. 국립극단 제공


특정 시대와 국가의 색이 강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말하는 내용이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연극은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 뿐 아니라 인종 문제, 정치와 이념, 종교 등 미국사회를 다층적으로 담아낸다. 다만 사회 문제 그 자체보다는 각자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개인의 분투와 내면의 혼돈을 더 공들여 보여준다. 신 연출은 “작품에 사랑, 용서, 관용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프라이어를 비롯해 극중 주요 인물들은 모두 성소수자다. 개신교부터 몰몬교, 유대교까지 인물들의 종교는 물론 직업 역시 전직 드랙퀸(예술이나 오락, 유희를 목적으로 여장을 한 남성)부터 권력에 집착하는 극우 성향 변호사까지 다양하다. 신 연출은 이중에서도 드랙퀸 출신 흑인 간호사 벨리즈에 주목했다. “벨리즈는 미국에서 가장 차별받았던 흑인이고 여러 층위의 불평등과 모순 속에 살아가지만, 그의 입에서 가장 멋진 말들이 나와요. 프라이어는 그를 ‘순교자’라고 부르죠. 순교자는 살아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어떤 씨앗이 뿌려질 것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벨리즈의 싸움 방식이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 제목이 ‘엔젤(angel)’이 아니라 ‘엔젤스(angels)’라는 복수인 것처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에게서 그 ‘s’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1·2부 러닝타임이 총 8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번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라는 부제의 1부를 먼저 무대에 올리고, 내년 2월 1부와 2부를 함께 공연한다. 장벽이 높은 장시간 마라톤 공연에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개막 전부터 관심이 뜨거웠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회차 공연이 매진됐다. 원작이 내포한 상징과 은유를 치밀하게 파고든 연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넘나드는 무대 구성, 배우들의 연기 모두 인상적인 작품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2> 등 주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동해온 배우 정경호의 연극 데뷔작으로, 천사의 메시지를 받는 중심 인물 프라이어를 맡아 호연한다. 정경호와 선후배로 함께 대학을 다닌 신 연출은 “프라이어 역에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아름다우면서도 남성적인 면모가 있는 배우가 필요했고, 가장 먼저 정경호 배우를 떠올렸다”면서 “정경호도 평소 연극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함께하게 됐는데, 8시간 연극을 몇개월 동안 해야하는지는 감이 없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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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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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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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초 공연될 2부의 부제는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 신 연출은 “‘파트 투’에서도 장벽을 철폐해가는 과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많은 이들이 익숙한 종교적 언어에 머물면서 스스로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죠. 그러나 죄, 용서, 화해, 구원, 영생, 종말, 심판, 천국, 재림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서고 서로에게 죄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언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재맥락화하는 것입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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