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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대법관 후보에 “고문 은폐 해명” 요구하다 ‘물의 판사’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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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물의’가 된 한편의 글


한겨레

2015년 박상옥 신임 대법관(가운데 꽃 꽂은 이)이 취임식에 참석해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오른쪽)과 걸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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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께서 임명 제청한 후보자를 반대하는 글이기 때문에 글 내리라는 연락이 올 수는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가지고 사찰한다거나 징계 검토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2021년 10월12일 사법농단 의혹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 증인으로 나온 박노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목소리에는 시간이 흘러도 해소되지 않은 황당함이 묻어났다. 2015년 박상옥 당시 대법관 후보자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은폐한 검찰 수사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적격 논란이 일었을 때다. 그는 4월16일 박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글을 법원 내부게시판 코트넷에 올렸다. “박 후보자는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에 협력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설명하고, 그럴 의지가 없다면 이제라도 후보자 자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현직 판사가 대법관 후보 임명을 공개 비판했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2015년 박상옥 대법관 후보 상대로

“박종철 수사팀 전력 설명” 글 쓴 뒤


행정처가 말하는 ‘물의 야기한 판사’란


이 한편의 글이 남긴 여파는 길고 질겼다. “글을 내리는 게 좋지 않겠나.” 그가 소속된 법원의 수석부장판사는 글을 삭제하라고 권유했다. “법원행정처에서 (내게) 연락이 왔는데 (댓글이) 법원 배석들 (전체의) 뜻이냐고 물어보더라.” 3~4줄의 지지 댓글을 단 판사가 법원장과 면담한 뒤 댓글을 삭제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예상된 전개였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박 판사의 과거 이력이나 해명 논리를 검토하는 등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2016년 2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은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보고서에 15번째로 그의 이름을 올렸다.

‘사법행정에 대한 불만을 공론화하려는 경향이 있음. 코트넷에 대법관 임명 반대 글을 게시해 법원 내·외부에 파문을 일으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매년 2월 정기 인사를 앞두고 사법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를 ‘물의 야기 법관’에 포함시키고 변칙적으로 징계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판사는 2~4년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니는데, 이를 이용해 통상적인 인사 패턴과 어긋나게 희망 임지를 배제하거나 오지로 배치해 불이익을 주는 식이다. 근무평정, 언론보도, 풍문 등을 종합했다는 물의 야기 목록에는 음주운전, 성범죄와 같은 명백한 비위뿐 아니라, 사법정책에 비판적 의견을 밝힌 사례까지 포함됐다. 그리고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결재로 불이익한 전보가 결정됐다. 당사자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소명이나 불복 절차도 물론 없었다.

2016년 정기 인사 대상이 아니어서 불이익을 피해갔던 박 판사는 “부적절한 처신(집단행동)”에도 “별도 조치가 없었”다며 2017년 2월 다시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에 올랐다.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선거운동을 했다는 소문, 좋은 재판 연구반 활동도 추가 기재됐다. 희망하는 지원장 보임에서 제외하는 게 1안으로 검토됐으나 남원지원장으로 보임되면서 인사 불이익은 다시 피해갔다.

그러나 그는 “인사불이익을 받았는지도 중요하지만 인사불이익 대상자로 검토된 것도 중요하다”며 “검토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불이익”이라고 지적했다. 도대체 당시 법원행정처가 정의한 ‘물의’라는 게 무엇이냐는 반문이다. “대법관 자격과 관련해 법관이라면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한 게 왜 법원에 물의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과 사법부를 위한다기보다는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자를 반대해 순조롭게 취임하는 데 논란을 일으켜 물의를 야기했다고 본 것 아닌가요.”(재판에서 확인된 2018년 12월 검찰에서의 진술)

임종헌 전 차장은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는 그 누구의 지시 없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작성된 문건이라고 거리를 뒀다. 그리고 인사 실무를 맡은 판사들의 진술을 인용해 그의 주장을 되받아쳤다. “물의 야기라는 표현은 바꿔야 하는데 그전부터 써와서 계속 쓰는” 것에 불과하다며 “질병이나 근무평정 불량과 같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도 인사에 특별한 고려 요소가 될 만한 건 최대한 폭넓게 포함시켜 인사권자의 판단 자료로 활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반박했다.

“당시 인사심의관은 코트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글 올리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거나 법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봐 물의 야기 법관에 포함시켰다고 하는데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임종헌 전 차장 변호인)

“(인사 담당자가) 그렇게 생각했고 징계 사유도 된다면 왜 (공식적으로) 징계에 회부하지 않고 그런 편법적인 인사 조치를 검토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박노수 판사)

“인사 실무자들은 징계보다 가볍다고 생각해서 종전부터 이렇게 해왔다고 하는데요.”(임종헌 전 차장)

“그런 생각 하면서 인사 실무 하는 것이 반헌법적인 사법행정이라는 겁니다.”(박노수 판사)

물의 야기한 판사로 찍혀 잇단 고초

“편법적 인사조처 검토가 반헌법적”

‘반대 의견 냈다가 불이익 우려’ 88.3%


“사법행정이 민주적 절차로 이뤄지려면 구성원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합니다.” 10월5일 임종헌 전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송승용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2015년 5월 전국 법관의 의견을 수렴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거취를 결정하자는 등의 글을 코트넷에 올려 2015~2017년 물의 야기 법관 보고서에 올랐고 실제 격오지로 발령받았다. 그는 인사권자인 양승태 대법원장과 인사 실무자 등 9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며 인사 재량권의 한계를 따지고 있다.

‘사법행정에 관해 대법원장, 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 표현을 한 법관은 보직, 평정, 사무분담 등에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 이 말에 공감하는 판사(11.4%)보다 공감하지 않는 판사(88.3%)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2017년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법관의 독립 확보를 위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 2017년 2월9일~2017년 2월28일 전국 판사 507명 응답) 그로부터 4년여 흘렀건만 인사 제도에 큰 변화는 없고 관련 재판은 진행 중이다. 사법행정에 의견을 표명할 때 윗선부터 떠올리게 되는 관료화의 그림자, 법원은 걷어낼 수 있을까.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 이후 여전히 진행 중인 ‘사법농단 재판’을 법정 르포 형식으로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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