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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반여동 월남민과 재송동 월남민, 두 피란민의 길 [김시덕의 이 길을 따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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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0> 부산 해운대구 재반로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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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과 재송동 사이를 잇는 재반로를 따라 걷는다.

재반로를 따라 걸으면, 한국이라는 국가가 겪은 두 개의 전쟁에 의해 발생한 두 부류의 피란민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반여동의 이른바 '정책이주지'에 정착한 월남민(越南民)·철거민이고, 또 하나는 1970~1990년대의 20년 정도 재송동에 머문 또 하나의 월남민(越南民) 즉 베트남 피란민들이다.

부산에 산동네, 달동네가 많은 까닭


'정책이주지'라는 단어는 부산이라는 도시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1950~1953년의 6·25 전쟁 당시 부산~대구 사이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은 북한군의 점령을 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북한군에 점령당한 지역에서 빠져나온 피란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서울이 함락된 시기에 임시수도였던 부산이 피란민들의 목적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 남부 출신의 피란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한반도 북부에서 내려온 월남민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부산에 눌러앉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어떤 신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판자집 거주자들은 거의 다 전재민(戰災民) 또는 월남 동포로 그날그날의 생활도 용이치 않은 터인데 판자집마저 없어진다면 생활이 더 말 아닐 것이므로 강제철거도 할 수 없는 것이고" (1957년 8월 20일 자 조선일보 '판자집 대책은 없는가?').

즉,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판자촌을 형성시킨 주요한 집단은 월남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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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반여동 정책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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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이들 월남민이 주축이 된 거주지인 판자촌은 도시 계획에 지장을 초래했다. 특히 평평한 땅이 부족한 부산의 경우는 판자촌 문제가 더욱 시급한 정책 과제가 되었다. 부산이라는 지역의 핵심은 원래 토지가 넉넉한 농촌 지역인 동래였고,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왜관이 설치된 좁은 의미의 부산 지역은 많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보니, 부산은 한국 안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높은 지역까지 산동네·달동네가 형성된 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과 서울 행정당국은 1960년대 중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구도심을 정비하고자 판자촌을 철거하고 빈민들을 도시 외곽이나 도시 바깥으로 몰아내는 사업을 시행했다.

서울시 당국은 1963년에 경기도로부터 서울시로 편입된 관악구 신림동·봉천동, 양천구 신월동·신정동, 강동구 강일동 등의 지역으로 서울 강북 구도심의 철거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렇게해서도 도심의 빈민촌이 사라지지 않자, 1969년부터는 철거민 십수만 명을 서울시 동남쪽 바깥의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 지역에 몰아넣어 신도시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광주대단지'의 탄생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루어진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이 2년 뒤인 1971년 8월 10일의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이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의 정책이주지들


광주대단지 사건이 전국적으로 주목받은데 반하여,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 이루어진 정책이주지 사업은 부산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부산 시민들도 이 정책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정책이주지는 해운대구 반여·반송동, 사하구 신평·장림·감천·괴정동, 연제구 연산동, 남구 용호·대연동, 부산진구 개금동 등의 18곳이며, 원래는 30곳 정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2017년 7월 31일 자 부산일보 '부산 정책이주지 18곳을 도시재생 뉴딜 모델로').

이들 지역이 1960~1970년대의 정책적 산물이라는 사실이 부산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며,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 외곽에 산다는 정도의 막연한 인식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책이주지 가운데 어떤 지역은 인터넷상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의 표적이 되어 물의가 빚어지기도 했다. 정책이주지가 왜 만들어졌고, 그곳으로 이주된 주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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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구 용호동 정책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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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부산의 정책이주지를 모두 답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부산에 갈 때마다 한두 곳씩 반드시 정책이주지를 들르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 소개하는 해운대구 반여동은, 해운대구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우리 해운대에 이런 곳이 있는가?"라고 놀랄 정도로 타지역으로부터 고립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속에 네모반듯한 길이 촘촘히 나있고 길 사이마다 지번이 빽빽히 들어선 모습은 위성사진상에서 한눈에 들어오며, 주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그 밀도에 숨이 막힌다. 실제로 반여동 현지를 걸으면, 다른 부산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던 산 중턱에, 소형 자동차 한 대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2~3층 건물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이 모습은 내가 답사한 남구 용호동, 사하구 장림동과 신평동 등 그 밖의 정책이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남구 용호동 정책이주지에 끝없이 들어선 판잣집과 '4호주택' 단지, 양옆에 붙어서 세워졌던 건물들이 철거되어 건물 한 채의 실제 폭을 보여주고 있는 사하구 신평동 정책이주지의 건물들을 아울러 살피면, 정책이주지의 다양성과 현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림동의 정책이주지 근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지인은 내가 찍어 보낸 골목길 사진을 보고는, 자신이 어릴 적 보던 풍경과 변함이 없지만 골목에 장애인용 전동휠체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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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하구 장림동 정책이주지에 위치한 새마을 경로당.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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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동 정책이주지의 어느 골목에서 '새부산 이용원'이라는 가게를 마주친 나는, 이제는 사라진 서울 송파구 마천동의 철거민 정착지를 떠올렸다. 그 인근에 있던 군부대가 경기도 동남부로 이전하고 위례신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자, 군부대 옆에 형성되어 있던 마천동 철거민 정착촌에서도 2017년에 철거가 시작되었다. 한 시대의 끝을 기록하기 위해 마천동 철거민촌을 걷다가 '새서울 이발관'이라는 가게와 마주쳤다. 1967~1971년 사이에 서울 중심부에서 서울의 끝으로 쫓겨나서도 서울시민으로 남고자 '새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게 주인은, 아마도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철거를 당했을 것이다. 부산 장림동의 '새부산 이용원'이 서울 마천동의 '새서울 이발관'과는 다른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정책이주지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서울·경기 지역의 달동네 및 광주대단지와 비교해도 그 규모가 밀리지 않는 부산의 정책이주지가 부산 내·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조금 자세히 말씀드렸다.

재반로를 따라 반여동 정책이주지를 통과해 산을 내려오면, 그 아래쪽에는 '79 아파트' '80 아파트' 등의 이름이 붙은 시영아파트들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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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80시영아파트. 1980년에 완공돼 이런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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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 건설된 아파트단지들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도 많이 세워졌다. 하지만 79 시영아파트의 옹벽에 붙어 있는 재난위험시설 안내판이 보여주듯이, 세운 지 40여 년이 되는 이들 재송동 시영아파트도 이제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사실 건물의 물리적인 안전도만 고려한다면 정책이주지의 건물들을 재건축하는 것이 더 시급해보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시기적으로 나중에 건설된 시영아파트 쪽이 먼저 재건축 대상이 되어 있다. "재건축은, 재건축을 필요로 하는 지역을 비껴간다"는 부동산 업계의 격언을 이곳 해운대구에서 새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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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시영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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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탈출 피란민촌의 흔적


재송동 시영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역에 다다른다. 1975년에 멸망한 남 베트남에서 탈출한 피란민들이 20년 정도 머무르던 해운대구 재송동의 피란민 수용소 자리다. 현재는 고층아파트단지로 재건축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한때 해운대구 반여동과 재송동에는 한반도 북부로부터의 월남민과 베트남 남부로부터의 월남민이 공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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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베트남 난민 수용소 자리.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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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 1차 베트남 피란민 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남 베트남이 멸망하면서 보트 피플이라 불리는 대량의 피란민이 발생하자 1977년 재송동에 2차 베트남 피란민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당시 사진에는, 부산이 낳은 대기업 '동명목재상사'가 제공한 버스를 탄 베트남 피란민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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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월남 피난민이 부산에 도착해 수용소로 이동하고 있다. 당시 차량을 제공한 부산의 대기업 동명목재상사의 로고가 선명하다.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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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베트남 피란민들은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1993년 미국인 사업가가 자금을 제공해서 이들을 뉴질랜드로 이주시키면서 재송동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미국에 이어 2위 규모의 군대를 파견했으며 경제 특수를 누리기도 했던 한국 시민들은, 베트남 난민들을 자기 사회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한국 기업이 무기를 수출했던 예멘 내전에서 발생한 예멘 난민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한국인들을 도왔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 대해서는 베트남 난민의 전례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회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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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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