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모던 경성] 연전 졸업반 박영준이 새해 첫날 신문사에 달려간 이유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작가 제조기’ 조선일보 신춘문예… 백석, 박영준,김유정, 김정한, 정비석,백신애 등 한국 문학의 별 발굴

조선일보

박영준은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모범경작생'으로 등단했다. 당시 스물셋이었다.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스물셋 박영준은 1934년 새해 첫날을 경성에서 보냈다. 방학은 으레 시골 고향에서 보냈지만 혹시 올지 모를 신춘문예 당선 통지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까지 연락은 없었다. 신춘문예 재수생이던 박영준은 재능을 한탄했다.

혹시나 싶어 새해 첫날 태평로 조선일보 임시사옥까지 달려갔다. 신문엔 당선작 ‘모범경작생’아래 이름 석자가 당당히 찍혀있었다. ‘누구의 어깨라도 치고 한바탕 소리를 질러보고 싶었지만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슴속의 흥분을 눌러야만 했다. 내 옆에는 내 즐거움을 알아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조선일보 1954년 11월18일 ‘당선되던 그날’)

상금은 30원. 웬만한 샐러리맨 한달치 월급이었다. 그길로 서점에 가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샀다. 신춘문예 당선은 움추러들었던 그에게 자신감을 줬다. ‘나도 문학생활을 할 수있다는 자신을 그 때 비로소 가졌다. 그것은 내가 운이 좋아서 당선되었다고만 생각할 수없으리 만큼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분야에서 '그 母와 아들'로 당선된 백석. 시인보다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다.


조선일보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초 동경 유학시절 단발을 한 백신애.


◇문학사에 수록된 신춘문예 스타

신춘문예는 1920년대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일간지와 ‘개벽’ 같은 잡지에서도 앞다퉈 상금을 내걸고 신춘문예를 시행했다. 한국 문학사를 일궈갈 작가들이 잇따라 탄생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초반부터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단편 소설분야만 해도 여성 작가 백신애(1929)를 비롯 백석(1930) 박영준(1934), 김유정(1935), 김정한(1936), 정비석(1937), 현덕(1938), 김영수(1939) 등이 줄이어 등단했다. 소설만 쳐도 당선작 ‘모범경작생’ ‘소낙비’(김유정) ‘사하촌’(김정한) ‘성황당’(정비석) ‘남생이’(현덕)와 함세덕(1940) 희곡 ‘해연’(海燕·1940)는 근대문학사에 남은 문제작이다.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는 1928년 신춘시 ‘전영사’(餞迎辭)가 당선됐고, 1929년 단편소설 ‘탈가’(脫家)가 선외가작에 뽑혔다. 일본 호세이대 불문과를 졸업한 이원조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문단 등용문”

정비석(1911~1991)은 ‘신춘현상문예를 통해 새로운 작가를 발견해내는 업적에 이르러서는 조선일보가 단연 타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었다’고 회고한 적있다. ‘가령 1933년에 시작하여 1940년8월에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폐간의 비운에 이르기까지의 8년간에 조선일보는 신춘현상문예로써 해마다 한 사람씩 신진작가를 등장시켰는데 그 모든 신인들이 당선과 동시에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조선일보의 신춘문예란 사실상 문단등용문이나 다름이 없었다.’(정비석, ‘신인의 등용문’, 조선일보 1954년11월22일)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뛰어난 작가를 배출할 수있었던 이유는 뭘까. 소설가 최인욱(1920~1972)은 ‘당시 조선일보가 학예란에 많이 치중하였고, 또 사내에 유수한 작가, 평론가들이 많이 있어서 고선 수준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최인욱, ‘일약문단서 공인’, 조선일보 1954년 11월22일)이라고 했다.

◇염상섭 이태준 정지용 임화 김기림 박종화 등이 심사위원

신춘문예 심사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와 해당 분야 전문가가 함께 진행했다. 1929년엔 박영희, 최독견이 참여했고, 1931년엔 염상섭 안석영 박팔양, 1940년엔 이태준 이기영 이원조(이상 단편소설), 최재서 박치우(문예평론), 안석영 서광제(시나리오), 박종화(시조), 이승규(한시), 윤석중(동요), 이헌구(희곡) 김영수(동화)가 심사를 맡았다. 기라성같은 작가, 평론가들의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통과한 것이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1927년12월1일자에 실린 신춘문예모집사고. '한 사람 이상을 위해 싸워본 이야기'와 '용의 이야기'를 공모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1924년 11월28일자에 실린 '신년문예현상공모'. 단편소설과 신시, 동화, 감상문과 자유화(그림) 분야에서 응모를 받았다. 1925년 1월1일자 신년호에 단편소설 당선작은 1등 허윤의 ‘쫓겨가는 이들’, 2등 최태원의 ‘물’과 김정숙의 ‘소년의 비애’가 실렸다.


◇신춘문예 前史이자 출발점, 1923년과 1924년 현상공모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신춘문예’를 내걸고 현상공모를 시작한 것은 1927년말부터다. ‘한 사람 이상을 위하야 싸워 본 이야기’와 ‘용의 이야기’를 모집했다.(조선일보 1927년12월1일)

그에 앞서 1923년12월 ‘신춘을 맞아 신년호의 지면을 독자들의 작품으로 장식하기 위해 원고를 모집한다’는 취지의 현상문예 공모를 냈다. 모집 부문을 문예란 유년란 부인란으로 구분했다. 문예란은 단편소설·감상문·시, 유년란은 동화·동요·만화, 부인란은 가정제도와 치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논문을 공모했다. 당선자에겐 조선일보 구독권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1등은 3개월 구독권으로 한달치 구독료가 95전이었으니 3원이 안되는 액수였다.

1924년엔 ‘신년문예현상’이란 이름으로 단편소설과 신시, 동화, 감상문, 그리고 그림(자유화)을 공모하고, 당선작엔 상금(액수 미상)을 줬다. 1925년 1월1일자 신년호에 발표된 단편소설 당선작은 1등 허윤의 ‘쫓겨가는 이들’, 2등 최태원의 ‘물’과 김정숙의 ‘소년의 비애’였다. 1924년 신년문예현상 공모는 ‘신춘문예 전사(前史)’이자 1920년대 민간지의 신춘문예 출발점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1926년과 1927년엔 각각 호랑이해와 토끼해를 맞아 ‘호랑이 이야기’와 ‘토끼 이야기’를 현상공모했다. 1928년부터 1940년 일제의 강제폐간때까지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춘문예를 시행했다.

◇엄선주의가 작가 등용문 비결

신춘문예 심사를 진행한 조선일보 학예부는 고민이 많았다. ‘거의 예를 보면 신춘문예에 고선의 수준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서 전부 응모된 종류 중에서 그 중에 제일 나은 것이면 의례히 1등으로 입선을 시키니까 해마다 문예의 각 부문에서 새로 등장하는 신인이 몇 사람씩 생기지만 이네들이 하나도 뒤이어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출세한 사람은 없었다.’(조선일보 1936년1월3일 ‘신춘현상문예고선경과’)

응모한 작품 중 수준에 관계없이 1등을 뽑은 결과, 당선자중 작가로 성장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1936년 적용한 새 심사기준은 이랬다. ‘한 작품을 어느 등수로나 입선을 시킬 때는 그 작품이 비록 완벽은 못되더라도 이만하면 현 문단의 수준에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만한 역량을 가졌으면 얼마 안되어서 작가로 행세할 수있다는 것을 고선(考選)의 수준으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선작을 내지 못한 분야도 속출했다. 1939년엔 희곡, 문예평론, 시조, 동화, 실화 분야에서 입선작을 한 편도 내지 못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연구한 손동호 연세대 HK교수는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우리 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할 수있었던 것은 고선 방침을 강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우수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 결과였다’(손동호, ‘근대신춘문예 당선 단편소설-조선일보편’ 33쪽,소명, 2021)고 했다.

◇파격적 상금과 발표 지면 제공도 기여

조선일보는 1929년 신춘문예에선 단편소설 1등 상금으로 60원을 내걸었다. 다른 신문보다 2배나 많은 액수였다. 그 결과 단편소설 응모편수가 500편에 달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1939년엔 상금을 50원에서 100원으로 인상한 결과, 신춘문예 전체 응모 수가 4535편에서 5362편으로 800편 이상 증가했다. 상금 인상을 통해 신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주효한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신문과 자매지를 통해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한 것도 주효했다. 뽑아만 놓고 사후 관리를 하지않아 작가로서 경력이 단절되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한 시도였다. 김유정, 김정한, 현덕, 김영수는 당선 직후 조선일보 지면에 작품을 연재했다.

1935년11월 창간한 월간지 ‘조광’은 신춘문예 당선자의 무대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중 조광에 작품을 연재한 작가는 김영수 김유정 김정한 박영준 백석 백신애 석인해 안필승 정비석 현덕 등 10명이었다. 김유정의 ‘동백꽃’ ‘봄봄’, 백석의 ‘여우난 곬족’, 김정한의 ‘낙일홍’, 백신애의 ‘소독부’, 정비석의 ‘금단의 유역’이 조광에 연재됐다.

12월은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원고를 마감하느라 분주하다. 박영준(1911~1976)은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의 일생 가운데 가장 즐거웠고, 또 가장 큰 희망에 찼던 시절을 그 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젊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선일보 1954년11월18일 ‘당선되던 그날’)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