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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정권 상관없이 30년 투자…지하 500m 佛초대형 방폐장 모습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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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농촌 마을인 뷔르의 풍경. 프랑스전력공사(EDF) 건물이 넓은 밭 위에 홀로 서있다. 이곳의 지하 500m에는 방사성폐기물 매립을 위한 연구 시설이 들어서 있다. 뷔르=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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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북쪽에 위치한 인구 90명의 작은 마을 뷔르(Bure). 밀밭이 넓게 펼쳐진 이곳 지하 500m에는 조밀하게 엮여 있는 갱도가 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이곳을 찾았을 때 프랑스의 방사성 폐기물(재처리 후 남은 폐기물)을 사실상 영구 매립하기 위한 연구가 한창이었다. 가로 5㎞, 세로 3㎞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에 방폐물을 안전히 묻을 '시제오'(Cigeo, 심지층 처분장) 건설 프로젝트다.

1991년 관련법을 제정한 후 30년간 진행돼 온 프로젝트다. 처음부터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쳤고, 뷔르 지역이 부지로 선정된 이후 2004년부터 연구시설을 가동해 지금까지 17년째 실증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처럼 정권에 상관없이 진행돼 온 결과 시제오는 2025년부터 실제 방폐장 건설을 시작,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 나온 방사성폐기물을 보관하기 시작한다.



과학자 수십명이 지하갱도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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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500m 갱도에서 작업자들이 점토를 나르는 모습. 뷔르=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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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시설의 안전성과 지역 주민의 지지 확보였다. 이를 위해 과학자 수십명이 지하 갱도에서 십수 년째 안전성을 시험 중이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프랑스 방사성폐기물관리청(ANDRA·안드라)는 "현재 지하 연구시설에서 일하는 170명 중 3분의 1은 과학자"라며 "지질학, 물리학, 화학, 환경공학, 지질공학, 지질수리학, 물리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안드라 측의 안내를 받아 안전장치를 입고 지하 500m 갱도로 내려갔다. 지름 5m 가량의 터널형 갱도가 조밀하게 엮인 ‘지하도시’가 나타났다. 회색 점토를 실은 지게차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갱도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지름 10m 가량으로 넓혀진 터널이 나타났다. 이곳에선 '처분공'(폐연료봉을 보관할 장소)의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굴착기가 점토를 파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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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 여부를 실험 중인 처분공. 프랑스 방사성폐기물관리청(ANDRA) 관계자가 처분공 실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뷔르=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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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방폐물을 수천년간 저장해도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처분장을 마련했다. 이유는 지질학적 요인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지형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두꺼운 점토층으로 이뤄져 있다. 점토층은 물의 침투가 일어나지 않고, 방사능을 차폐하는 기능을 발휘한다고 안드라 관계자는 설명했다.



100년 뒤 발달할 기술까지 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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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층 처분장 시제오(Cigeo) 부지 지도. 오른쪽 상단의 부지가 실제 심지층 처분장이 건설될 위치다. 뷔르=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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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라는 이 점토층에 무인 시스템으로 폐연료봉을 안전히 묻고, 경우에 따라 100년 뒤에는 폐연료봉을 다시 꺼낼 수도 있게 자동화 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다. 안드라 관계자는 갱도에서 점토층에 묻힌 처분공을 보여주며 "처분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 지 여부를 실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00년 뒤 방폐물을 처리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나면 다시 폐연료봉을 꺼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라면서다.

안드라는 현재까지 연구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판단, 내년에 법령제정 허가를 요청할 계획이다. 2025년 처분장건설허가법령이 제정되면 실험 갱도와 같은 실제 처분 갱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20년 동안 파일럿 실험을 거쳐 결산 보고를 한 뒤 본격적으로 장수명 중준위폐기물, 고준위방폐물을 묻을 예정이다. 먼저 장수명 중준위폐기물부터 매립하기 시작해, 고준위 폐기물은 2080년부터 저장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2150년에는 방폐물이 이 부지에 전부 채워진다. 이곳에는 고준위폐기물 1만㎥, 장수명 중준위폐기물 7만3000㎥를 저장할 수 있다. 프랑스 원전이 지금까지 생산한 폐기물을 다 채우고도 저장 용량의 절반이 남는다.

프랑스는 자국 에너지의 원전 비중을 현재 75%에서 2050년 50%까지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원전 전 생애주기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는 여전히 확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원전이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지역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원전을 가동하는 국가가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방폐물을 안전하게 처분하는 일이다. 프랑스는 이같은 초대형 방폐장을 건설하기까지 30여년에 걸친 준비 과정을 거쳤다.



한국도 시급한 방폐물 처리…佛, 주민 신뢰 어떻게 얻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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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화 과정을 거친 방사성폐기물 모형.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프랑스 라아그(La Hague) 재처리 시설을 운영하는 공기업 오라노(ORNAO) 관계자가 유리고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라아그=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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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폐물 처분 문제는 한국에서도 시급하다. 한국은 1978년 첫 원전(고리 1호기) 가동 이후 40여년간 임시저장소에 쌓아둔 사용후핵연료만 1만7500여t으로 포화에 이른 상태다. 하지만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각종 저항에 부닥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오락가락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은 원전 시설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지역에서도 방폐장 건설에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신뢰를 얻기까지 투명한 정보 공개와 의견 수렴과정, 과학적 안전장치 마련에 부단히 애를 썼다. 시제오 프로젝트도 두 차례에 걸친 대국민 공개토론과, 각종 공청회, 이해 당사자 간의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신뢰를 얻어왔다. 규제기관인 프랑스 원자력안전청(ASN)이 꾸준히 실사한 뒤 관련 정보를 지역 주민들에게 공개한다.

국가 차원에서 지역에 재정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등 인센티브에도 후하다. 안드라 관계자에 따르면 방폐장이 있거나 가까운 뫼즈와 오트망 등 2개 도(인구 총 36만)에 현재 기준 연간 3000만 유로(약 400억원)를 매년 투자할 예정이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 지하연구시설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방폐물 관리기금을 조성해 중소기업 육성 등에 투자해왔다.



사용후핵연료 재활용, 폐기물은 줄이고 또 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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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오 시설이 가동을 시작하면 프랑스는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는 문제를 사실상 해결하게 된다. 사용후핵연료 대부분을 재활용하고 남은 방폐물의 부피를 줄이고 줄여 시제오에 묻는 공정이 완료되기 때문이다. 라아그(La Hague)에 있는 초대형 재처리 시설에서 사용후핵연료의 96%를 재활용 연료로, 남은 4%를 '유리고화'라는 공정을 거쳐 폐기물을 유리 물질 속에 가두는 방법이다. 라아그 재처리 시설을 운영하는 오라노 측 관계자는 "방폐물은 유리고화 과정에서 부피는 5분의 1로 줄고, 독성은 10분의 1로 낮아진다"고 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한국으로서는 일단 현재 가진 사용후핵연료라도 안전하게 처리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그러려면 지하 연구시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교수는 "관리 계획 법령을 차근차근 만들고 시한을 정해야 현재 낙후한 연구도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뷔르=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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