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이슈 미술의 세계

희귀 고려 나전칠기의 귀환... 온전한 형태의 자합은 전세계 3점뿐 [해외 한국문화재를 만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편집자주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재단은 경매에 출품되거나 고미술상·개인 등이 소장한 문화재 중 희귀하거나 의미 있는 문화재는 매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매입한 문화재는 국내에서 조사, 연구, 전시 등에 활용됩니다.”

'국외문화재 매입' 사업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홈페이지에서 위와 같이 소개되고 있다. 희귀(稀貴). 드물어서 특이하거나 매우 귀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가 꼭 들어맞는 문화재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신의 관심사나 기준에 따라서 제각각이겠지만, 고려 나전칠기가 국내외와 전공을 막론하고 희귀한 문화재라는 점에 이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한 고려 나전칠기 중 한 점이 지난 2019년 일본에서 돌아와 지난해 7월 국내에 공개됐다.
한국일보

2019년 일본 개인으로부터 매입하여 국내로 돌아온 ‘나전국화넝쿨무늬합’.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전칠기는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아낸 뒤 문양을 오려내어 기물의 표면을 장식한 칠공예품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전복패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빛에 따라 오묘하고 다채로운 색채를 띤다. 주로 사용된 기법으로는 자개를 문양 형태대로 오려 붙이는 주름질, 자개를 문양대로 오려낸 후 조각도로 음각하여 세부를 묘사하는 조패법, 조개패로 무늬를 오려낸 후 평면에 부착하기 위해 망치로 때려 표면에 균열을 생기게 하는 타찰법, 자개를 좁고 긴 띠 형태로 자른 뒤 문양 형태에 따라 끊어 붙여서 표현하는 끊음질 등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로 사용된 기법이나 애용된 문양 요소 등에서 차이는 있으나 나전칠기는 현재까지도 계속 제작되며 사랑받고 있다.

고려 나전칠기의 특징으로는 금속선을 사용하여 넝쿨무늬나 경계선을 장식했다는 점, 바다거북의 등껍질에 붉은색이나 노란색 등을 칠한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나전의 우수성과 정교함은 당대에도 이미 인정되어, 중국 송(宋)의 사절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1091~1153)이 개경에 한 달여 머무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 나전칠기는 ‘극히 정교하고(極精巧])',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細密可貴)’고 언급되고 있다.

실제 나전칠기는 완성까지 줄잡아 20여 단계를 거쳐야 하며, 옻칠은 온습도에 예민하여 작업공정 자체가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일례로 최근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소목과 옻칠, 나전, 장석까지 분야별로 4명의 장인이 협업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전경함을 재현하였는데, 무려 2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환수한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이하 나전합)'은 길이 9.8㎝, 높이 2.7㎝에 무게는 50g 남짓한 작은 기물이지만 비파괴분석을 통해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과 재료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몸체는 얇게 켠 목재로 모양을 잡았는데, 몸체의 곡면은 목재에 칼집을 넣은 뒤 꺾어 만들었으며, 목재 위로는 천을 바르고 옻칠을 한 뒤 자개를 붙이는 목심칠기(木心漆器)이다.

뚜껑 상면과 합의 측면에는 주 문양인 국화무늬와 넝쿨무늬를 빼곡하게 배치하였다. 꽃잎과 잎사귀는 자개를 하나하나 오려 붙였으며 국화꽃 하나는 15개 내외의 작은 꽃잎들로 이루어지는데, 공구도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에 나전칠기 제작 과정의 지난함과 고려의 장인정신을 감히 짐작해볼 수 있다. 뚜껑 가운데의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 부분에는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얇게 갈아서 만든 판의 안쪽에 안료를 칠하여 바깥으로 비쳐 보이게 하는 대모복채법을 적용하여 붉은색과 주황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고 있다. 뚜껑 테두리에는 동그랗게 오린 자개를 구슬을 꿰어 늘어놓은 듯 촘촘하게 장식했다. 또한 금속선을 사용하여 넝쿨 줄기와 기물의 외곽선을 따라 장식했는데, 작은 합에 다양한 문양 요소와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조화로움을 결코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듯 자개나 대모(玳瑁)가 일부 탈락된 부분도 눈에 띄나, 무리하게 수리를 시도하여 원형을 잃는 경우와 달리 있는 그대로 보존해 왔다는 점이 오히려 이 나전합의 의미를 더해준다.
한국일보

나전국화넝쿨무늬합 뚜껑 상면. 국화, 넝쿨무늬와 함께 연주문과 두 줄로 꼰 금속선 등이 조화롭게 어울려 장식돼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 나전칠기는 불화, 청자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공예품으로 손꼽히고 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적어, 경함(經函)과 합(盒) 등 모든 기형을 통틀어 전 세계에 불과 20여 점만이 알려져 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보스턴미술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영국박물관 등 해외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정작 고려 나전칠기의 생산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실물을 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국내에는 완전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로 '나전대모국화넝쿨무늬불자'를 유일하게 보유하다가 지난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회가 일본으로부터 매입해 기증한 '나전경함(螺鈿經函)'이 추가되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번 나전합의 환수는 세 번째이자, 지금까지 국내에 없던 기형의 고려 나전칠기를 소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환수된 나전합은 하나의 큰 합 속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가는 모자합(母子盒)을 이루는 자합(子盒) 중 하나이다. 모자합은 나전칠기뿐만이 아니라, 무늬가 없는 칠기나 상감청자로도 만들어져 사용되어 왔으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화장용 상자의 일부이거나 향합(香盒)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수된 나전합은 꽃 형태의 가운데 자합을 둘러싼 4개의 삼엽형(三葉形) 자합 중 하나인데, 고려 나전칠기 중 이렇게 모합과 자합을 모두 갖춘 것은 안타깝게도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자합조차도 전 세계에 단 3점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며, 그중 매매가 가능한 개인소장품은 이번에 환수된 나전합 단 1점뿐이다. 자그마한 자합 하나로도 이토록 영롱하고 찬란한데, 모합까지 전체가 다 갖춰졌을 때의 그 화려함과 위용이 어떠했을지는 잘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일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청자상감모란문모자합. 모자합은 칠기 외에 상감청자로도 만들어졌다. 상감청자를 통해 모자합이 어떻게 구성되고 활용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나전칠기는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재단이 수차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소장자와 꾸준하게 접촉하여 마침내 매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19년 초 매입 사업의 실무자 중 한 명으로서 나전칠기 구입 절차에 함께하며, 예정된 일정에 맞춰 진행되는 경매와 달리 소장자가 언제 매도 의사를 분명히 하고 얼마를 희망할지에 대한 대답을 끌어내기까지 예측 불가능함에 마음을 졸였던 기억, 일본 현지에서 유물을 처음 실견했을 때의 느낌, 마침내 한국으로 들어와 최종 상태 점검을 하고 공개행사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내기까지의 순간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특히 2019년 말부터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소장자와 계약 및 유물을 들여온 직후부터 사실상 한일 간 왕래가 어려워졌던 걸 생각하면, 간발의 차이로 업무 추진이 몇 배 더 힘들어질 뻔한 상황을 피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한국일보

국내로 돌아온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개인 소장자가 보관 시 사용한 포장재 일체도 함께 한국으로 들여왔다. 손 크기와 비교해 나전합의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전합 환수 시 매입 재원이었던 ‘국내외 소재 중요 문화재 긴급매입비’는 국내외의 경매에 출품되거나 소유자의 매도 의사가 확인된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다. 동산문화재뿐만 아니라 부동산문화재의 매입에도 활용되고 있다. 효과적인 예산 집행을 위해서는 매입 계획 수립과 우선순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화재 유통 시장의 특성상 향후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가 차원에서 대응이 필요한 문화재가 한 해에 몇 건이나 경매에 출품될지부터 얼마에 낙찰될지, 희귀한 한국문화재나 중요한 부동산문화재를 가진 개인 소장자의 매도 의사를 확인하고 얼마에 응해줄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희소한 문화재일수록 자연스럽게 가격 역시 높을 수밖에 없는데, 매입 재원을 뛰어넘는 초고가 문화재는 시장에 나온다고 해도 즉각 대응이 쉽지 않다는 어려움도 있다. 물론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그간 축적해온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등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다행인 점은 해외 한국문화재의 매입과 환수에 대한 인식이 점차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4월 통계 기준, 약 20만4,693점의 한국문화재가 해외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단 설립 초기에는 이러한 국외문화재들이 모두 약탈이나 도난 등 불법적으로 해외에 유출된 것이며 모두, 무상으로 되찾아와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다. 현재는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은 유관기관과 수사 공조 등의 절차를 통해 해결하지만, 선물이나 구입 등의 방식으로 반출된 것 중 국내에서 연구·활용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것은 매입을 추진하는 등 문화재의 성격이나 반출 경위에 따라 환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자리 잡고 있다. 재단은 앞으로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꼭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재들이 다시 우리 곁에서 의미를 더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갈 것이다.
한국일보

남은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 선임


남은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 선임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