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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아무튼, 주말] 경찰 제복엔 남녀 구분이 없다… “여경 조롱의 상처, 부상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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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 ‘어떡해’만 외친다?

커뮤니티 밖 진짜 여경들

조선일보

마포경찰서 박소현 순경이 112 신고를 받고 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박 순경은 “여성 피해자는 범죄 사실이 자신의 치부라 생각해 남성 경찰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그때 여경이 피해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게 해준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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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또 뭔데? 잡지 말라고, 이 XX야.”

서울 광진구의 한 골목, 거친 욕설과 비명이 뒤섞였다. 만취한 20대 남성이 편의점에 있던 남녀 커플을 ‘묻지 마 폭행’한 것. 피해자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자 남성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의를 벗어던졌다. 경찰이 제압하려 남성을 넘어뜨리자 경찰의 왼쪽 넷째 손가락을 남성이 이로 물어뜯었다. 인대가 끊어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경찰은 침착하게 등 뒤로 수갑을 채웠다. 한밤의 난동꾼을 제압한 이 사람은 누굴까. 근육질의 남성 경찰? 오산이다.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의 정미영 여성 경위가 지난 5월 겪은 일이다.

또 ‘여경 논란’이다. 지난달 15일 인천에서 벌어진 흉기 난동 사건에서 여경의 현장 이탈을 두고 ‘여경 무용론’ ‘여경 폐지’ 주장까지 나왔다. 실제로는 출동한 남녀 경찰 모두 현장을 이탈해 지난 1일 해임됐다. 같은 식의 논란은 2019년부터 있어왔다. 이른바 ‘대림동 여경 사건(실제 발생지는 구로동)’ ‘관악구 여경 사건’이다. 논란 속 여경은 무력하게 ‘어떡해’만 외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논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확산하며 여경에 대한 조롱과 혐오를 낳고 있다.

그러나 경찰 제복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경찰 업무도 마찬가지. 취객 난동 제압부터 살인 현장 출동까지 남경이 한다면 여경도 한다. 올해 상반기 전체 경찰 중 여성 비율은 13.5%, 신임 순경 1894명 중 여경은 524명(27.7%). 이들이 겪는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은 ‘여경 논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무튼, 주말>이 온라인 커뮤니티 밖, 진짜 여경들을 만났다.

◇칼 막고 바닥 굴러도 ‘논란’뿐

지난 10월 23일 새벽, 자신이 폭행을 당하고 있으니 출동해 달라는 40대 남성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해당 남성은 이전에도 다툼으로 신고 이력이 있었는데, 사건 처리 결과에 앙심을 품고 이날 출동한 경찰에게도 흉기를 휘둘렀다. 마포경찰서의 박소현(34) 순경은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함께 구르며 목 근육이 찢어졌다. 박 순경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로변이라 주위에 시민들이 있었고,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같은 관할 지역에서 근무하는 1년 차 김모(25) 여성 순경은 한 달 전 ‘남편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신고를 받고 긴급 출동했다. 당시 신고자가 있던 집 안에는 딸과 사위가 함께 있었지만 날 길이 20cm가 넘는 식칼 두 자루를 든 남편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딸이 보고 있습니다. 선택 잘하세요.” 몸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김 순경은 피의자를 타이르며 칼을 압수한 후 상황을 종료시켰다.

근무 중 다치는 일도 빈번하다. 취객에게 손가락을 물렸던 화양지구대 정미영 경위는 인대가 끊어지고 근육이 파열돼 사건 직후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정 경위는 “출동 현장에서 일하다 다치는 건 두렵지 않지만, 조롱이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여성 후배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건 두렵다”며 “여경이 아무리 강력 사건을 다뤄도 대중의 기억에 남는 모습은 ‘논란’뿐이라 안타깝다”고 했다.

◇연말이면 더 바빠지는 김 순경

박 순경은 지난달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 50대 여성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갔다. 사소한 부부 다툼이 몸싸움으로 번진 상황이었다. 박 순경은 “가정폭력 여성 피해자는 범죄 사실이 자신의 치부라 생각해 남성 경찰에게 말하기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그럴 때 여경이 나서 피해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시키고 2차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여성 피의자를 상대할 때도 여경이 필요하다. 지난달 말 마포구의 모 초등학교 앞에 만취한 20대 여성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김 순경이 출동했다. 함께 출동한 남경은 불필요한 성추행 논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접촉을 피하려 했다. 김 순경은 “여성이라도 술에 취해 널브러지면 무게가 배가 되는데, 내가 우리 팀 유일한 여경이라 해당 여성을 혼자 둘러멨다”며 “연말연시 모임이 늘면 주취자도 늘어 야간근무 때는 항상 긴장 상태”라고 했다.

◇여경 조롱, 뜯어보면 반길 일?

여경 비율은 해마다 조금씩 늘고 있다. 관리직을 제외한 경찰 중 여성 비율은 2018년 11%에서 올해 상반기 13.5%로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신임 순경 전체 1894명 중 여경은 27.7%에 이르는 524명이었다. 경찰을 비롯해 어떠한 조직이든 특정 성별이 전체의 70%를 넘지 않아야 조직 균형이 맞는다는 설명도 있다. 조주은 경찰청 여성청소년안전기획관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전체의 70%를 넘으면 조직 특성을 과잉 대표할 우려가 있는데, 이때 70%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임계수치(크리티컬 매스)”라며 “현재 여경 비율이 13%를 갓 넘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했다.

반복되는 여경 논란은 여경의 수가 늘고,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주은 기획관은 “남성만 있던 환경에 여성이 진입하니 눈에 띄고, 불편한 시선도 생기는 것이니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지난달 인천 사건은 단순히 여경의 문제가 아닌, 기습 공격을 예상치 못한 현장 경찰관들의 대응력 부족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1호 여성 총경이 본 ‘여경’

여성 최초로 경찰 총경에 올랐던 김강자(76) 한남대 교수는 후배 여경들에게 쓴소리를 던지기도 했다. 김강자 교수는 1991년 서울경찰청에 근무할 당시 여자형사기동대를 처음으로 신설했다. 여성도 똑같은 경찰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여경들에게 당직 근무도 서게 했다. 김 교수는 “당시 남경들은 여경이 편한 일만 한다며 암적인 존재라고 조롱했다”며 “그런 말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사 부서가 아닌 민원 부서에 있을 때도 범죄자를 잡아 일선에 넘겨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오랜 생각은 여경이 남경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거의 같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범인을 제압하고 검거하는 게 경찰 역할인데, 여성은 뒤로 물러나 있으려 하고 남성은 남성대로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제대로 돌아가질 않지요. 물론 잘하는 여경들도 많고, 체력도 좋아진 편이지만 갈 길이 아직 먼 것 같습니다.”

경찰은 인천 흉기 난동 사건의 후속 조치로 ‘현장 대응력 강화 특별교육’을 내놨다. 임관 2년 차 이하 남녀 신임 경찰관 1만620명을 대상으로 체포술과 테이저건 이용법을 교육할 예정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부실 대응 논란이 교육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있다. 경기 지역에서 근무하는 이모(25) 여경은 “테이저건을 쏜 뒤 적법하게 쐈는지, 꼭 필요한 상황이었는지 증명해야 할 서류와 절차가 많다”며 “인천 현장에서 테이저건을 못 쓴 건 판단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복잡한 사후 절차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마포경찰서 박 순경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은 지 8년 만에 합격했다. 생활비와 학원비를 지원할 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동네 마트와 편의점, 서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다. 그에게 존경하는 여경 선배가 있는지 물었다. “스스로 롤 모델이 돼야죠. 재작년 말 경찰에 합격한 뒤 엄마가 ‘인간 승리다’ 하시며 울었어요. 정작 저는 무덤덤했지만. 우왕좌왕하며 ‘어떡해~’만 외치는 여경은 안 되려고요. 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경찰이 될 겁니다.”

[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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