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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사설] 이제는 ‘주권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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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22]⑥주권자의 책무

[경향신문]

경향신문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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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발밑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일상에선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면 불평등과 빈곤, 기후위기와 환경파괴,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 발달 등 대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과 ‘삶’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중이다. 하여, 당신은 흔들리는 발밑을 지켜줄, 정직하고 유능한 리더십을 갈망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지도자가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를 기대한다.

당신은 그럼에도 내년 3월9일 치러지는 20대 대통령선거를 떠올리기가 고통스럽다. 이른바 ‘비호감’ 대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가 더 좋아서 선택하기보다, 누가 덜 싫어서 선택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였다. 이조차 저울질하기 싫어 아예 투표장에 안 가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의민주주의는 투표 행위를 통해 완성되지만, 기권 또한 선택지에서 배제되는 건 아니다. 다만 ‘선거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서’ 선택하는 ‘묻지마 기권’이어선 곤란하다.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2007년 프랑스에서 대선 직전 출간돼 화제가 된 책이다. 저자인 철학자 장 폴 주아리는 “투표를 하는 나라에서 시민 개인은 사유하고, 토론하고, 읽고, 분석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이 옳다. 당신은 비호감 대선이라며 외면하기 전에, 기권을 선언하기 전에, 성실하게 학습할 필요가 있다. 어떤 후보자와 정당이 공동체를 이끄는 데 더 적합한지 판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과 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선택의 원칙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이탈리아 정치학자 모리치오 비롤리는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에서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린다. 마키아벨리는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조언은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눈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고 판단하라.”(군주론) 정치인들에 대해 판단할 때는 그들의 외양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평가하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위장술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비롤리는 “우리 공화국에서 가장 긴급한 이슈인 개인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 사회정의, 이민, 교육, 환경 등을 둘러싼 입법 과정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 나선 유력 후보 중에는 국회의원 경력이 전혀 없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공적 인물’로 살아오면서 한국 사회의 핵심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하고 평가한 흔적들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의 발언이나 행동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정치인의 자질을 효과적으로 평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어떤 통치자의 능력에 대해 사람들이 갖게 되는 첫 번째 평가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들이 유능하고 충성스러우면 통치자는 분별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측근의 신하들을 선택하는 첫 번째 일부터 실수를 범한 것이기 때문에 군주는 형편없는 평가를 받게 마련”(군주론)이라고 했다. 당신은 이미 각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구성과 인재 영입 과정을 보면서, 조금씩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을 터다. 남은 90여일 동안 더 많은 평가의 근거들이 쌓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수많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지지율 여론조사에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선거 과정에서 쏟아지는 막말과 네거티브, 소수자 비하 발언에 질렸을 수도 있다. 여론조사는 자동응답(ARS) 조사인지, 실시간 면접조사인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표본 선정 방법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참고자료로만 생각하는 편이 낫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범람하는 ‘믿거나 말거나’식 정보도 가능한 한 걸러내야 한다. 대신 당신의 눈과 귀로 직접, 찬찬히 후보자들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정책과 공약도 타인의 시선이 아닌 당신의 관점에서 살펴보길 바란다. 고가 아파트를 갖고 있지 않은 당신이 ‘종부세 폭탄론’에 휘말려 흥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대 양당 사이에 끼어 주목받지 못하는 소수정당·후보의 정책과 공약도 들여다보자. 지금 당장 실현이 어려워 보이는 공약이라도, 선거 과정에서 정교해지고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 언젠가 당신의 삶을 개선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와 정치인은 절대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동할 때, 그 행동이 뚜렷하고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때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당신과 가족의 삶을 낫게 만들려면 행동하고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반드시 투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당과 후보를 ‘학습’하고 ‘검증’한 후에도 투표장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 선택에 이르는 과정을 통째로 생략하는 건 책임 있는 주권자의 자세가 아니다.

다시 장 폴 주아리의 말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민주주의는 어쩔 수 없이 약하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성향 때문에 민주주의는 힘을 갖는다. 미래는 현재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현재에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당신의 시간, 주권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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