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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굴복해 '독립투사' 거처 훼손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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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 위용 앞에 무릎 꿇은 티무르 제국의 후예들

만일 주 대한민국 일본 대사가 천안에 있는 유관순 생가 부근에 새 공관을 짓는다면서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전국민의 공분을 사고도 모자라 심각한 외교적 갈등으로까지 번질 것이다. 하지만 일대일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중앙아시아에선 그 반대의 상황도 심심찮게 연출된다. 이번 기사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중국의 서북공정에 따라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의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싸운 민족투사의 거처를 훼손한 사례를 소개한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초대 수반은 우즈벡족이었다

중앙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이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란 명칭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위구르 문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 역시 중앙아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33~1934, 1944~1949)의 재건을 도모하는 결사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설립자는 정작 위구르족이 아닌 오늘날의 우즈벡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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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의 깃발 ▲ 현재는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은 미 국무부에서도 테러 단체 명단에서 제외시켰을 정도로 그 활동과 영향력이 미미해진 상태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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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처럼 하나였던 우즈벡과 위구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제정 러시아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백성이었던 중앙아 무슬림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특히 제국령에 산재한 여러 투르크 지역민들을 각자의 '민족'으로 승격시켜 자주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언어·역사학자들은 과거에 파묻힌 '우즈벡'과 '위구르'라는 명칭을 꺼내 들었다. 스탈린의 조종을 받던 동서 투르키스탄의 정주(定主) 투르크 지도자들 역시 수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 같은 민족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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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번역 중인 우즈벡 대표 문학인 푸르캇의 친필 회고록 ▲ 1930-40년대까지의 중앙아에서 위구르와 우즈벡의 구별은 우의미한 것이었다. 두 민족은 언어 및 문자, 종교, 문화가 모두 동일한 상황에서 단지 지역적으로 분리됐을 뿐이었다. 실제로 필자 역시 우즈벡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음에도 위구르어 실력만으로 18-19세기에 작성된 우즈벡 대표 문학인 푸르캇(Furqat)의 회고록을 무리 없이 읽고 번역할 수 있었다. ⓒ 송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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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소련식 프레임에 저항하는 지도자도 있었다. 키르기즈스탄 톡막(Toʻqmoq) 출신의 우즈벡이자, 1944년 신장 북부에서 중국을 격퇴한 무슬림 혁명군의 리더 알리 한 토라(Alixon Toʻra Sogʻuniy)가 바로 그였다.

유년시절 메디나와 부하라에서 아랍·페르시아어 교육을 마친 알리 한 토라는 전통적인 투르크 엘리트에 속했으며, 평생을 중앙아 투르크인의 자주해방을 위해 분투한 인물이다. 그는 투르크 무슬림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우즈베키스탄'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투르키스탄'이란 명칭을 고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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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한 토라의 초상 ▲ 소련 및 중공 지배 이전의 중앙아는 지금처럼 러시아어나 중국어가 아닌 아랍·페르시아어가 대접받던 시대였다. 특히 18-19세기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 프랑스어가 교양어처럼 쓰인 것 마냥 중앙아에서도 페르시아어는 지식인들의 언어로 통용됐다. 따라서 알리 한 토라와 같은 인물들을 최후의 중앙아 무슬림 귀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알리한토라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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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한 토라의 혁명군은 신장 북부를 점거하던 국민당 부대를 몰아내고, 1944년 그를 신생 투르크 국가의 초대 수반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44~1949)의 시작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1946년 여름 KGB를 동원해 알리 한 토라를 비밀리에 납치하곤 타쉬켄트에 감금해 버렸다. 그리고 빈 자리에는 아흐멧잔 카시미, 압둘케림 아바스와 같은 위구르족 공산주의자를 심어놨다. 그러나 이들 역시 1949년 여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몰살되고 동투르키스탄은 재차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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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맷잔 카시미(오른쪽)와 압두케림 아바스(왼쪽) ▲ 1946년 알리 한 토라가 납치된 후 권력을 장악한 아흐맷잔 카시미와 압두케림 아바스 외 3인의 공화국 지도부는 1949년 8월 말에 베이징에서 열릴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코자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이후 행방불명됐다. 위 사진은 소비에트식 선전술에 따라 공화국 수반이 말하는 '중요 사상'을 수첩에 열렬히 받아 적는 보좌진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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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동서 투르키스탄의 근현대사를 읽노라면 19세기 이후로는 중국과 소련 같은 외세에 의존치 않고 민족자결을 추구했던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알리 한 토라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고 1976년 노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30년의 연금생활 동안 못다한 꿈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두 권의 책을 펴냈는데, 첫째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생애를 투르크어로 알기 쉽게 풀이한 <무함마드의 역사(Tarixi Muhammadiy)>이고, 둘째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설립의 전후사정을 회술한 <투르키스탄의 비극(Turkiston Qayg'usi)>이다. 전자는 우즈벡·위구르인들이 즐겨 읽는 이슬람 교양서 중 하나이며 후자는 위구르 근현대사 연구를 위한 최중요 사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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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알리 한 토라(백색 옷에 검은 모자의 노인) ▲ 알리 한 토라는 이슬람 종교지식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1946년까지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타쉬켄트 연금 중에는 향촌 의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여기서 '한 토라(xon to'ra)'는 명망 있는 투르키스탄 귀족들에게만 부여되는 존칭으로 몽골·투르크어로 군주 혹은 지도자를 의미하는 '한(khan)'과 법령을 의미하는 '토라(Tore)'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및 터키에 살고 있는 그의 자손들 역시 종종 '한 토라'라는 존칭을 사용한다. ⓒ 알리한토라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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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 인물을 꼽으라면 티무르 제국의 설립자 아미르 티무르, 중세 투르크어의 아버지 알리시르 나와이, 또 무굴 제국을 건설한 바부르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우즈베키스탄은 상기 위인들의 역사를 크게 홍보하며 정책적으로 국민적 숭배의식의 아이콘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전국 각지에 '티무르 거리' '나와이 공원' '바부르 광장' 같은 장소가 즐비하며, 이들을 위한 박물관 및 사적지도 곳곳에 마련돼 있다. 하지만 알리 한 토라에 대해서는 변변한 기념관조차 건립된 바 없고 교과서에도 전혀 기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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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켄트에 소재한 알리 한 토라의 묘역 ▲ 실제 필자가 만난 우즈벡인 대다수가 알리 한 토라가 누군지조차 몰랐고, 설령 알고 있어도 '이슬람 학자'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투르키스탄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분투한 민족열사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리 한 토라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는지 본인의 회상록 서문에서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내 조국이 날 반기지 않아도 내 그를 사랑하고, 내 민족이 날 낯설게 보아도 내 그들과 정겨운 까닭에, 조국에 벌어진 역사의 굴곡과 이로 인한 일장일단의 결과를 기술해 후대에 본보기로 삼고 타인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 권의 역사기록을 펴낸다. 나는 이슬람을 믿지만 그보다 앞서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내 민족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헌신해야 옳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지난 청춘을 소요했다."? ⓒ 알리한토라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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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소련 공산당에서 오래도록 봉직한 우즈벡 주류 정치인들은 알리 한 토라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일을 결코 반기지 않는다. 티무르 같은 위인을 내세워 '우즈벡 민족'의 자존감을 띄우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한 민족주의자여서가 아니다. 이는 현 우즈벡 위정자들이 과거 습득한 소비에트식 선전술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사상교육을 위해 구미 당기는 인물들만 선별해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다. 자연히 공산당에 뿌리를 둔 현 우즈벡 정부에게 소비에트와 대척점에 섰던 알리 한 토라는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중국 서북공정에 매수된 타쉬켄트 주정부

알리 한 토라의 후손들은 수차례 타쉬켄트 주정부에 서한을 보내 그가 30년 동안 연금당한 저택을 유지·보존하고자 애썼다. 그의 애국정신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마지막 30년의 삶이 서려 있는 거처를 역사기념관으로 재건할 것을 강력히 청원했다고 한다.

반면 주 우즈베키스탄 중국 대사는 끈질기게 알리 한 토라의 저택 부지를 중국에 공여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현 대통령 미르지요예프가 취임한 2016년 말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경제부흥을 추구하는 새 정권에서 중국은 어느덧 러시아와 1, 2위를 다투는 우즈벡 최대의 수출입 상대국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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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해버린 알리 한 토라의 거처 모습 (아래) ▲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게 표시된 '알리 한 토라 거리(Alixon To'ra Sog'uniy Ko'chasi)' (위). 알리 한 토라에겐 생전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두 명의 부인과 차례로 사별한 후 맞은 마지막 아내로부터 막내 이드쿳을 얻었다. 1946년생인 이드쿳은 현재 터키로 이주했고, 또 연로한 탓에 정부의 압박에 맞설 힘이 없었다. 그래서 부친의 저택과 생전 사용하던 가구 등 모든 유품 및 집기를 단돈 5천 달러에 골동품상에 넘기고 우즈벡과 인연을 끊어 버렸다. (현재 이드쿳 일가는 터키 시민권을 취득해 살고 있다) 알리 한 토라의 다른 후손들은 저택을 팔아넘기는 것을 적극 만류했지만 중국과 우즈벡 양측의 보복을 두려워한 막내아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해 떠나 버린 것이다. ⓒ 송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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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8년 5월 알리 한 토라의 저택은 철거됐고 그 주변은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중국 대사는 새 건물을 짓겠다고 약속하고선 막상 목적을 달성하자 입을 싹 닫았다. 이후 3년이 지나도록 공터로 남아 있는 해당 부지에는 잡풀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즉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중국의 서북공정에, 그것도 뻔한 속임수에 보기 좋게 당한 셈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도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우즈베키스탄 국사(國史)에서 단 한 마디의 언급조차 없는 불세출의 영웅 알리 한 토라, 그의 영혼은 지금쯤 일대일로에 자존심을 팔아버린 '티무르'의 후손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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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어 사용국가 연맹(Organization of Turkic States) 로고 ▲ 2021년 10월 이스탄불에서 '투르크어 사용국가 연맹(OTS)'이 공식 출범했다. 터키를 주축으로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까지 5개국이 참여했고 참관국으로 헝가리와 투르크메니스탄이 합류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중국을 견제할 돌궐 제국의 부흥'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허나 필자의 생각에 이는 중앙아에서 터키제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한 외교적 술책에 불과하다. 실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터키는 중앙아에 실효적 영향력 없이 늘 종교민족적 동질감에 호소하는 소극적 정책만을 펼쳤고, 이것이 구체적인 성과를 낸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이유는 터키가 지리적으로 너무 먼 데다, 실제 중앙아의 모든 민족을 '투르크'로 묶기엔 각자의 이해관계가 크게 상충하기 때문이다.? ? ⓒ OTS



송호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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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알림잔(송호림)은 東西 투르키스탄의 근현대사와 고전 차가타이어를 연구하는 독립적인 아마추어 사학자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위구르 문제를 단편적으로 바라보며 실제와 다르게 소개하는 경향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 거주하며 페이스북에 '중앙아시아 연구회(Central Asia Research Group of Korea)' 모임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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