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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참된 행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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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몸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야금야금 제 속을 파먹어 들어가는 달, 신이 몸속에 살게 되었어.”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 이원 시인은 정보 네트워크와 연결된 채 살아가는 우리 몸의 상태를 점검한다. 아침에 깨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인간은 브라우저 결합체나 다름없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정보 아카이브에 접속할 수 있어서 모르는 것은 검색해 답을 얻고 바라는 것은 찾아내 주문할 수 있으니, 시의 비유대로 기도에 늘 답해 주는 신을 몸 안에 데리고 사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 삶은 더 좋아지고, 우리 마음은 더 행복해졌을까?

지난 한 달의 삶을 돌이켜보자. 검색을 위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낚시에 홀려 엉뚱한 정보를 클릭하며 시간을 허비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쇼핑 앱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팝업에 이끌려서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을 구매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친구 소식이 궁금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했다가 관심을 호소하는 자극적 게시물에 빠져서 정작 친인의 삶을 챙기지 못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정보의 신과 동거한 이후, 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사는 일이 오히려 잦아지고 있다. 정보에 중독되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 삶은 좋은 삶이 아니다.

적당한 정보는 인간을 현자로 만들지만, 지나친 정보는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 인간의 삶은 길어야 100년이고,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인생의 단계마다 오랜 시간 동안 수없는 검증을 거쳐서 편집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은 빠르게 바보가 된다. 우리에겐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정련된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와 정보를 무작위로 연결하는 정보의 신은 불행히도 우리를 어리석게 만든다.

제한 용량보다 더 많이 수용하면 뇌는 과부하 탓에 작동을 멈춘다. 쌓기만 하고 처리하지 못할 때 정보는 인생의 질서를 공격한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착각하고, 기억할 일과 망각할 일을 가리지 못하며, 애써 충족할 일과 참고 견딜 일을 분별하지 못한다. 정보의 동맥경화는 곧장 삶의 동맥경화를 유발한다.

이원 시인은 경고한다. 우리 “몸속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 브라우저가 깃들어 살면서 우리 몸은 확장되기는커녕 나날이 옥죄이는 중이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불어닥치는 정보의 폭풍은 우리 뇌의 신경망을 두들기고 우리 마음을 공격한다. 우리 집중력을 무너뜨리고 관심을 가로채며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 내면은 정보에 파먹혀 허물어지고, 우리 머리는 잡다한 신호로 산만해지며, 우리 몸은 부풀어 오른 욕망으로 비좁아진다.

과잉의 결과는 충만함이 아니라 구멍 뚫린 삶의 공허다. “몸은 구멍투성이야. 신들의 취미는 피어싱. 구멍은 신들의 수유구. 아니면 주유구. 세상은 구멍이야.” 시인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우리 인생에 구멍을 뚫는다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멍으로 만든다고 경고한다. 무분별한 정보의 홍수는 인간을 점점 불행하게 만든다.

매일경제

▶물이 아니라 항아리를 돌보는 게 지혜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불행이란 영혼에 구멍이 난 상태라고 말했다. <고르기아스>에서 그는 영혼을 술 항아리에 비유한다. 현명한 자들은 항아리를 온전한 형태로 관리해서 적당한 술로도 찰랑찰랑 채우고 살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항아리가 구멍 뚫린 채 내버려 두면서 무한정 술을 쏟아붓고도 늘 모자란다고 외친다. 바보들은 더 많이 가지고도 불만에 시달리나, 현자들은 더 적게 가지고도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의 충족되지 못한 욕망, 즉 삶의 근본적 불행은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리석어서 생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와 우매를 가르는 문턱이 욕망의 절제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절제란 무엇보다 자기 한계를 아는 일이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인간은 몇 바가지 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인간은 옷을 수십 벌 껴입을 까닭이 없다. 아무리 땅이 많아도 마지막 몸을 누일 자리는 예닐곱 척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 보여도 시간의 시련을 거치면서 인간 경험을 압축한 지혜 덩어리는 흔하지 않다. 쏟아지는 정보가 우리를 현자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듯,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무한히 욕망을 채우려 하는 일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물질이든, 정보든 절제를 모르는 사람은 영혼의 구멍, 즉 공허를 이기지 못하고 끝없이 갈망에 몸부림친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물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면서 항아리를 돌보는 게 지혜롭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설화가 보여주듯, 깨어진 항아리를 채우려면 쏟아부을 더 많은 물이 아니라 뚫린 구멍을 막아 줄 영혼의 두꺼비가 필요하고,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돌본 자만이 극한의 시련 속에서도 행운을 얻는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수많은 철학자가 욕망은 채우려 할 때는 절대 충족시킬 수 없고, 줄이려 애쓸 때만 간신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외쳐 왔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말한다. “무슨 일에서든 경솔하게 열광하며 공허한 분방함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은 요행을 누리더라도 그만큼 더 불행해진다. 이런 이들은 항상 비참함에 시달린다. 반대로 모든 일에서 경건한 마음을 품고 느긋이 행하며 공연한 마음의 병에 시달리지 않고 향락의 꽁무니를 쫓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불행의 짝은 경솔한 열광과 공허한 분방함이고 행복의 친구는 경건한 마음과 느긋한 행동이다. 유행에 들떠서 휩쓸리는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계절마다 쏟아지는 옷들, 해마다 출시되는 차들, 먹방이 추천하는 맛있는 음식들, SNS에 널려 있는 핫한 여행지들이 우리의 현재 상태를 불만에 빠뜨린다. <고리오 영감>에서 발자크는 이야기한다. “좋은 날씨에 샹젤리제에서 줄지어 가는 마차들을 보면서 감탄하기 시작하면, 곧 그런 마차를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정보의 신이 공급하는 온갖 행복 이미지는 우리 마음을 공격한다. 텔레비전에서 꾸며놓고 자랑하는 연예인의 삶이나 SNS에서 꾸며서 포장한 타인의 삶을 훔쳐보면서 오직 자기 삶만 불행하다고 느끼는 불안과 우울이 불꽃처럼 번지고 있다. 시쳇말로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

“사치의 악마가 그의 가슴을 물어뜯고, 돈벌이의 열기가 그를 사로잡고, 황금의 갈증이 그의 목을 말라붙게 했다.” 상젤리제의 마차를 부러워하던 청년 라스티냐크가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성을 던져버리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듯,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 창출된 인공행복은 우리를 불행의 나락에 떨어뜨린다. 입기 전에, 타기 전에, 먹기 전까지는 행복의 모방이 우리 가슴을 두근대게 하지만, 혹여 내 것이 되더라도 그 순간부터 시시해지면서 덧없는 공허가 밀려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을 살피면서 숙고를 거쳐서 찾아낸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의 조건은 쏟아붓는 물의 양이 아니라 항아리의 상태에서 결정된다. 달콤하고 화려한 바깥 정보에 흥분해 어떻게 내 항아리에 가져다 부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허무를 얻을 뿐이다. 정보의 격랑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자기를 살핀 사람만 구멍 없는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마르쿠제는 “행복의 역사는 스스로 행복을 탐구하고 발견한 사람들의 역사”라고 말했다. 저 바깥에는 행복이 없고, SNS는 불만 네트워크에 불과하다. 타인의 행복을 흉내 내는 대신 자기 그릇을 꼼꼼하게 살피는 사람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 행복의 길은 바깥의 유혹을 무찌르는 절제와 자기 영혼의 한계를 아는 지혜에서 시작한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5호 (2021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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