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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인생+] 지성의 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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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로 인해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은 집 가까이에 있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인데, 수십만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서가를 누비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그 가운데 특별한 코너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기증된 도서들의 서고(書庫)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마광수 교수 등의 이름으로 마련된 구역들에는 몇만 권의 책이 주제별로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그곳에 있다 보면 마치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 앉아 계시던 서재를 잠시 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경향신문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책의 제목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고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느낌이다. 이런 방면으로까지 관심을 갖고 계셨구나, 그 광활한 지적 호기심에 놀라기도 한다. 책을 펼치다 보면 당신께서 밑줄을 그어놓았거나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적어놓으신 손글씨, 그리고 어쩌다가 책갈피에 꽂혀 있는 메모지를 만나기도 한다. 그분들의 생애를 떠올리면서 마주하는 육필은 나지막한 목소리처럼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읽지 못하신 듯한 책들도 꽤 있는데, 나 같은 후학들이 공부하라고 내주신 숙제처럼 느껴진다.

책은 인간의 유산 가운데 가장 오래 남는 물건들 중 하나다.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후세들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선인들이 영위했던 공부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그 흔적을 더듬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생애의 좌표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래된 서재는 여러 세대의 삶을 이어주는 통로인지도 모른다. 도서관이나 고서점에서 낡은 책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긴 터널을 오가는 셈이다.

얼마 전 구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가 이제 눈이 어두워져 책을 읽을 수 없으니 당신의 책들을 모두 가져가라고 하셨다. 서재에는 몇백 권의 책들, 그리고 몇십 권의 독서 노트가 꽂혀 있다. 독서 노트는 예전부터 종종 건네주신 바 있는데, 역사 관련 지식, 고전의 명구, 한시, 시사 상식 등이 담겨 있어 내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나도 딸들에게 남겨줄 노트를 만들어 내용을 채워간다. 후세에게 전해줄 것을 챙겨가며 수행하는 독서 편력은 ‘학이시습’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가보처럼 물려주고 싶은 책 100권 정도를 고른다면 어떤 목록이 작성될까. 청소년기부터 애지중지하던 책들부터 나이가 들어 새삼 가치를 발견한 책들까지 다채로운 모음이 될 것 같다. 그 한 권 한 권에는 저마다 각별한 사연이나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점들이 여러 갈래의 선을 그리면서 삶의 중요한 경로를 구성해왔다. 훗날 아이들이 그 선들을 연결해 형형색색의 무늬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어떤 지성을 상속받았는가. 나는 후손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주고 싶은가. 저마다 배움의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생애의 주제를 간추려보자. 인생의 우여곡절을 건너면서 밟아온 징검다리들이 다음 세대의 자산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가다듬어보자. 그 흐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은 심화되고 확장된다. 빛바랜 책들에 깃든 세월의 향기를 맡으면서 나이듦의 맛과 멋을 음미한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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