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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여성복은 예뻐 보이면 그만? 또 다른 차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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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리스 의류’ 브랜드 퓨즈서울 대표 김수정씨의 남다른 철학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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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즈서울 대표 김수정씨는 남성복에 쓰이는 질 좋은 원단과 봉제기술, 활동성 등의 장점을 토대로 여성의 몸에 맞춘 젠더리스 의류를 제작해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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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스파 브랜드가 만드는 옷도
원단·봉제법 등 남성복보다 허술
장식용인 주머니까지 편견의 산물

여성에 맞춰 정교함 살린 슈트 등
다양한 제품으로 새 선택지 제공

기지개만 켜도 찢어지는 블라우스, 장식용인 바지 주머니, 보풀이 심해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없는 니트. 쇼핑 후 매번 비슷한 실패담을 경험한다면 옷을 고르는 안목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옷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내 몸’이 문제일까.

젠더리스 의류 브랜드 퓨즈서울 대표 김수정씨(28)는 “여성복은 ‘예뻐 보이면 그만’이라며 저렴한 원단을 쓰고 허술한 봉제로 마감한 옷을 판매하는 건 보세 시장만이 아니다”라며 “패션 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스파(SPA) 브랜드 역시 같은 형태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대표는 “제대로 만들어진 의류를 착용해본 경험이 쌓일수록 여성들이 옷을 고르고 소비하는 기준 역시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해 대학에서도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블라우스와 원피스 등을 판매하는 여성복 쇼핑몰을 운영했다. 여성복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남성복과 비교해보기 전까지 여성복의 문제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연히 남동생 바지를 입고 놀랍도록 편한 경험을 했다는 김 대표는 “일할 때 편하게 입으려고 구입한 여성용 운동복 바지를 입고 질염에 걸린 적이 있어 더 의아했다”며 “왜 이렇게 착용감이 다른지 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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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국내외 대표 스파 브랜드 7곳에서 같은 시즌에 나온 비슷한 가격대의 재킷과 바지 등을 여성복과 남성복 모두 구입해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사용되는 원단의 재질과 봉제법, 주머니의 개수와 깊이 등이 달랐다.

그에 따르면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는 남성복은 ‘착용자가 활동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 여유분이 있는 반면 대다수의 여성복은 ‘보이는 라인’에만 초점을 맞춰 여유분이 없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주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여성들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주머니가 깊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없어도 된다는 건데 이건 편견이죠. 제가 만든 옷에는 주머니를 최대한 많이 넣자고 결심했어요.”

여성복의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하고 싶다는 생각에 김 대표는 기존 쇼핑몰을 정리하고 2018년 남녀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의류 브랜드 퓨즈서울을 선보였다. 옷들은 우선 질 좋은 원단에 몸을 옥죄지 않도록 패턴에 여유분을 줘 활동성을 높였다. 손이 많이 가지만 옷이 잘 틀어지지 않고 세탁에도 강한 ‘쌈솔’ 방식으로 제봉했다. 바지나 재킷에 주머니도 많이 넣었다.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공임비를 추가로 요구하는 여성복 공장과 거래를 끊고 합리적 가격을 제안하는 곳으로 거래처를 옮겼다. 이렇게 탄생한 퓨즈서울의 대표 상품 ‘슈트’는 김 대표의 로망이자 그간의 고민과 노력이 담긴 제품이다.

“남자들이 슈트 한 벌에 셔츠, 넥타이만 바꿔입는 게 너무 부러웠어요. 여자들도 가성비 좋은 슈트를 입었으면 했지요.”

전형적인 남성복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신체에 맞춰 정교함을 살린 슈트는 면접을 앞둔 여성 취준생이나 직장인들 사이에서 편안하고 멋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매자들의 반응에 힘입어 김 대표는 일상복에서 운동복, 생활한복, 속옷으로 종류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 퓨즈서울은 별다른 홍보 없이도 매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여성복과 남성복에 숨은 차별에 대한 에세이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시공사)를 펴낸 김 대표는 내년 개장을 목표로 여성전용 문화체험 공간을 준비 중이다.

그는 “여성들이 안전하게 다양한 제품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며 “단순히 의류만 파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과 함께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진주 기자 jinj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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