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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한국, 보관장도 못 짓는데…1.4만t 핵 재처리시설 지은 프랑스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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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 26일 프랑스 라아그 재처리시설의 저장 수조. 수조 안에 사용후핵연료들이 보관돼 있다.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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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선량계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26일(현지시간) 오전 프랑스 서북쪽 코탕탱 반도 끝자락의 ‘라아그’(La Hague)에 있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시설. 부지 면적만 300ha(헥타르)에 달하는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엄중하다. 시설 내ㆍ외부엔 철조망이 겹겹으로 설치돼 있다. 입구엔 총을 든 무장 직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프랑스 국영원전기업 오라노(ORANO)사가 55년째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온 시설이다.

지난 13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최종 협상을 마무리하고 폐막한 제26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석탄사용 감축에 합의하면서 탄소 배출이 없는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는 전체 전기의 72%를 원전으로 생산해 독일 등 유럽 각국에 송전해 재생에너지 사용 확산을 뒷받침해왔다.

기자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초청으로 이날 프랑스의 국가보안시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선 철저한 신분 확인을 거쳤다. 이어 ‘갱의’(방호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한 뒤 피폭량을 재는 수동 선량계를 손에 찼다.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 문을 열고 직원과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통로 옆으로 노란색의 창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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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라아그 재처리 시설 전경. 한국 기자들을 환영하는 의미의 태극기가 걸려 있다.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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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후핵연료가 담긴 연료봉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조 저장 바구니에 담기러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이는 작업자들과 1.4m 두께의 차폐벽으로 분리된 공간에 있다. 오라노 관계자는 “(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한) 1986년부터 지금까지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차폐벽 너머에선 ‘로봇팔’이 움직였다. 원격 제어를 받는 이 로봇팔이 전등을 갈고, 케이블을 관리한다.

보안과 안전을 위해 엄중하게 관리되는 이곳의 총 근무 직원이 1만7000여명(이 중 5200명은 쉐르부르 근방서 근무)에 달한다. ‘재처리 도시’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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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처리된 플루토늄 모형.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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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프랑스 라아그의 재처리 시설에서 핵·연료봉이 보관수조 바구니에 담기러 내려가고 있다.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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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과 바닷길로 밀봉돼 라아그로 온 사용후핵연료는 저장 수조 시설에서 2년 간 식힌다. 수조의 크기는 160제곱미터(80m x 20m)가량이다. 수심은 9m, 이곳에 바구니 속에 담긴 사용후 핵연료봉이 들어있다. 오라노 관계자는 “바구니 위로 있는 4m의 물도 우리를 방사능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전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라아그는 저장 수조 4개를 가지고 있고, 모두 합쳐 1만4000t의 사용후 핵연료를 저장할 수 있다.

이 핵연료봉들이 재처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재처리를 하면사용후 핵연료는 3가지 형태의 물질로 나뉜다. 플루토늄(1%)과 우라늄(95%), 폐기물(핵분열생성물ㆍ4%)이다. 플루토늄과 우라늄은 다시 원전에서 쓸 수 있는 ‘재활용 연료’로 가공된다. 폐기물은 ‘유리고화’ 과정(유리 고체 안에 핵분열생성물을 가둬놓는 기술)을 거쳐 훗날 시제오(Cigeo) 방폐장에 사실상 영구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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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라아그 재처리시설의 폐기물 임시 저장고. 정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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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화된 폐기물을 임시 저장 중인 저장고로 이동했다. 지하 10m에 거대한 구멍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사람 한 명이 쏙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둥그런 통 500개가 매립돼 있었다. 한 통의 깊이는 1m80㎝다. 이곳엔 독일ㆍ벨기에 등의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한 뒤 나온 폐기물을 저장한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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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라아그 재처리시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방호복 등 장비를 갖춰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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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관련 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다. 오라노사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이후, 2015년부터 매년 300만유로(40억 5000만원)를 투자해 라아그의 노후시설 안전성을 높이는 데 썼다고 한다. “라아그 부지 바로 옆에도 지역 주민들이 안전하게 산다”고 오라노 관계자는 강조했다.

한국은 사용후핵연료가 포화 상태다. 1978년 첫 원전(고리 1호기) 가동 이후 40여년간 국내 원전 임시저장소에 쌓아둔 사용후핵연료는 1만7500여t에 달한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프랑스는 사용후핵연료 기술이 공학적으로 앞서나가는 반면, 한국의 경우 사용후핵연료들이 포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처분장 확충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상태”라며 “지금은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자체가 미적미적하고, 지난 5년간 시간만 낭비됐다”고 말했다. 이어 “일단 현재 갖고 있는사용후핵연료라도 안전하게 처리하려면 지하 연구시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며 “사용후핵연료 관리 계획 법령을 빨리 만들고 시한을 정해야 낙후한 연구도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같은 각종 정책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안전성 확보와 더불어 국민의 동의다.

황주호 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2008년쯤 라아그를 방문했을때, 기차에서 사용후핵연료를 내린 뒤 트럭에 실어 후송하는 모습을 봤는데, 동네 사람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 없었고 불안해 한다는 느낌도 없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반면 독일 등에선 사용후핵연료 운반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철로에 사슬로 몸을 묶는 등의 데모가 있었다”고 했다. 황 전 교수는 "프랑스 과학자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정부가 오랜 시간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기 때문”이라며 “원전 관련 정책은 국민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고 국민 신뢰는 투명성으로 얻어진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 고위 관계자도 “프랑스에서는 법령으로 정한 정보 공개와 안전 실사, 정기적인 보고서 공개 등으로 지역 주민들의 원전 유치 수용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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