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3 (화)

다시 달린 이봉주… 허리는 못폈지만 웃음꽃이 피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원인 모를 허리 고통… 쾌유 기원 마라톤서 2년만에 1.2㎞ 뛰어

42.195㎞를 지친 기색 없이 거뜬히 달리던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51)가 28일 부천종합운동장 400m 트랙을 한 바퀴 돌 때쯤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에 왼손을 얹었다. 그리고 달리는 대신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그때 트랙 밖에서 달리기를 지켜 보던 110여 명이 약속이나 한 듯 그의 등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 “이봉주 파이팅!”

고통스러워하던 이봉주가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걷기와 뛰기를 두 차례 더 되풀이한 끝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그는 이날 열린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서 마지막 주자로 1.2㎞를 달렸다. 걸린 시간은 10분 1초. 선수 시절에 비하면 거리와 기록의 숫자는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그가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나온 박수갈채는 그가 뛰었던 여느 대회만큼이나 힘차고 길게 이어졌다. 표정도 우승했을 때만큼 밝았던 이봉주는 “중간에 너무 아파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덕에 힘 나서 뛰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근육 긴장 이상증을 앓고 있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씨가 2021년 11월 28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 참가해 페이스메이커들과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봉주씨는 마지막 1.2㎞ 구간을 뛰어 결승선을 통과했다./이덕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라토너인 이봉주에게 병마가 찾아온 건 지난해 1월이었다.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거운 것을 끌고 난 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원인 불명의 병 탓에 5분만 걸어도 숨을 가쁘게 몰아쉴 만큼 힘들었다. 지난 6월 척추 수술을 받은 덕에 아직 허리는 펴지지 않지만, 잠시 혼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수술을 마치고 노문선 부천시육상연맹 회장의 제안으로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서 약 23개월 만에 다시 달리기로 결심했다.

이봉주의 레이스를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110명이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이 1⋅2조로 나뉘어 4㎞씩 뛰고, 이봉주가 마지막 1.2㎞를 뛰었다. 이봉주처럼 척추소뇌변성증이라는 희소병을 6년간 앓고 있는 오영복(40)씨는 1조에서 맨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마쳤다. 도착 지점에서 기다리던 이봉주가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오씨는 “이봉주 선수가 ‘잘 뛰었다’ ‘고맙다’고 하더라”며 “정말 안 좋은 생각도 수차례 들었는데, 응원하러 와서 오히려 힘을 받고 간다”고 했다. 척추 협착 질환 등으로 수년간 못 걷다가 재활 중이라는 장경문(65)씨도 완주에 성공했다.

마지막 이봉주가 1.2㎞를 뛰기 시작할 때는 절친한 사이인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52)의 두 아들 이지우⋅이현우(21) 쌍둥이 형제가 옆에서 도우며 달렸다. 이봉주가 아기 때부터 많이 예뻐한 형제였다. 두 바퀴째부터는 참가자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듯 이봉주 뒤를 따라가며 이름을 외치고 격려한 덕에 1.2㎞ 완주에 성공했다.

마라톤은 홀로 42.195㎞를 달려 순위를 겨루는 외로운 경기다. 이봉주는 연습까지 합치면 지구 둘레를 4번 달릴 수 있는 총 16만1700㎞를 뛰었다고 한다. 20년간은 그 긴 거리를 외롭게 달렸는데, 이날은 1.2㎞의 짧은 거리를 110명과 한 몸처럼 달렸다. 이봉주는 “약 2년간 인생에 찾아온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만큼이나 병든 마음을 여러분의 응원과 걱정으로 치유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영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