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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행복한 자연사’라는 분명한 나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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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백신을 맞았습니다만


한겨레

그림 박조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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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의 백신 접종 날짜를 받아 놓고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여러 불안을 자극하는 기사나 소문들 때문만은 아니지만, 또한 아닌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양쪽으로 귀가 열린 사람이니 들리고 보이는 말들을 막아설 방법은 없었다.

20년 넘게 호르몬 주사를 맞고 살아오면서 나는 인간의 육체란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환경이나 상태에 대처해 생존하려는 몸의 생리는 집요했다. 굳이 몸을 성별로 호명해야 하는 거라면 생식 역할에 관한 것일 뿐 모두 각자의 성별이 있고, 건강은 그 아래에 다른 방식으로 떠받친 또 다른 몸이었다. 건강을 위해 우리는 해답이 아니라 제 몫의 균형이 필요하단 걸, 오십이 넘어서야 제법 선명하게 체험하는 중이다.

백신 접종 앞에 다시 소환된 불안

호르몬 투여했던 몸에도 괜찮을까

가장 보편적 육체를 위한 약제


오십이 넘은 지금에는 어떻게든 가늘고 길게 살아보려고 호르몬 주사마저 끊은 상태다. ‘환하게 웃으며 천수를 누렸던 성소수자’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오래 사는 일’은 이제 내 몫의 운동이 됐다. 이 특별한 삶이 혼자만의 힘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행복한 자연사’는 그만큼 분명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니 백신 앞에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보편적 육체를 기준으로 만들었을 이 약제가, 이십여년 호르몬제를 투여한 몸까지 생각해주었을까? 게다가 지금은 또 다른 항바이러스제까지 복용 중이니, 그 영향은 또 다르지 않을까? 평소 진료를 받던 의사에게 묻고 괜찮을 거라는 답변까지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얼굴이 바뀌는 담당 의사의 말은 불안을 떨쳐 낼 수 있을 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4년 전 처음 간경화로 인한 항바이러스제 복용을 시작했을 때,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말해두었으니 어딘가에 기록되었겠지만, 몇 글자의 기록만으로 그들은 내 상태를 충분히 이해한 걸까?

한겨레

사진 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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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수술’ 안 한다며 나를 내쫓던 서울 대형병원 의사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 나라 최고라는 의료기관마저 치료를 거부하다니, 나는 그때 병원 정문 밖의 세계가 사막 같았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 들어서고 휘황찬란한 문명이 눈앞에 번뜩여도, 나에게는 모두 쓸모없는 모래 더미처럼 보였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든, 가족 구성권이든, 차별받지 않을 권리든, 사회적으로 마땅히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묵살되는 성소수자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척박한 모래땅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땅을 같이 일구는 것이 정부의 일이고 정치의 몫일 텐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지운 채 미래를 말하고 현실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결론은 이기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첫발을 뗀 이래 단지 소수이기에 목소리가 지워진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 벌써 80년 가까이 된다. 애초에 그런 삶이 없던 것처럼 지워진 채 살았던 것도 모자라 조롱당하고 혐오의 대상까지 됐던 삶이, 평생 그런 취급을 받다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한겨레

사진 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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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르다’니, 말도 안 된다. 늦어도 너무 늦다.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정치인들의 말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인정하는 고백일 뿐이다. 무지로 인한 사회적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국민이 ‘괴물’이거나 ‘변태’인 채 그 삶을 살다가 사라졌는데,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대통령선거가 코앞이라고 미래를 말하고 청년을 말하는 정치인들을 보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성소수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표를 위한 편 가르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마음은 너무도 참혹하다. 지금 어떤 국민의 그토록 선명한 불평등은 묵인하면서, 미래의 공정함을 약속하는 정치인의 정치는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일 수 있을까?

지난 금요일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봤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장면 중 하나는, 호적 정정 신청을 하고 마지막 판결에 앞서 한결씨가 판사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상처받거나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사시라는 판사의 부탁은, 법전 속 그 어떤 법 조항 한줄보다 더 위대한 것이었다. 법을 위한 법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법을 시행하고, 또한 한 사람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우리 사회 법조인의 목소리는, 너무도 커다란 위안이었다. 한결씨에게뿐만 아니라 관객석에 있던 나에게까지, 아마도 영화를 본, 보게 될, ‘소수’이기에 위축된 삶을 사는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하고 견뎌낸 불안으로

누군가의 삶이 지켜지길 바란다

공존하는 사람의 배려


백신을 맞기 전날, 나는 푹 잤다. 아침을 든든히 먹었고, 동전 지갑 속에 불안을 잠가두고 집을 나섰다. 결정은 필요했고, 내 몫의 결정을 했다. 여전히 우리 삶의 기본값은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고, 존중을 가장한 차별과 혐오의 말들을 들어야 하는 일상이지만, 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결심이라고 믿기에 내 몫을 다했다. 다른 누군가에겐 각자 결정해야 하는 또 다른 시민의 몫이 있으리라. 다만 일상 회복을 위한 조급한 마음이 우리의 공감을 무디게 하고, 또 다른 차별과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주사를 맞기도 전에 마음의 근육통은 벌써 온몸을 내리눌렀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이 비슷한 통증을 느꼈으리라.

백신을 맞기 전에 진통제를 사려고 약국부터 찾았다. 그동안 항바이러스제를 처방받으며 간단히 인사를 나누던 약사는 그건 간에 독성이 있어 나에게는 좋지 않다고, 다른 걸 꺼내주었다. 그가 지켜준 공존하는 사람으로서 배려 덕분에 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공존이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최소한의 이해와 관심으로 누군가의 고통이나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

백신을 맞고 이틀 정도 앓았다. 예전에 맞던 독감 백신과는 분명 예후가 달랐고, 배터리가 한칸 빠진 것만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두번째 백신을 맞고는 조금 더 아팠다. 이틀 정도 앓고 괜찮았다가, 일주일이 지나 갑자기 열이 올라 또 하루를 더 쉬었다. 내가 감당하고 견뎌낸 불안으로 누군가의 삶이 지켜진 거라고 믿고 싶다. 불안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모두의 안심이 더해진 거라면 충분했다.

김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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