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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옷소매 붉은 끝동’ 역사와 극적 상상력의 절묘한 버무림 [김재동의 나무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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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

[OSEN=김재동 객원기자]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아내와 사별한 남편의 애통한 심정이 절절한 이 문장들은 정조 이산이 의빈 성덕임을 기리며 어제비문·어제의빈치제제문·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등에서 밝힌 심경이다.

조선조 후궁 중 희빈 장옥정과 함께 본명을 남긴 유이한 인물 의빈 성덕임.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정조 이산(이준호 분)과 성덕임(이세영 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산이 덕로 홍국영(강훈 분) 등 측근들과의 비밀회합을 위해 기방을 찾았을 때 혜빈 홍씨(강말금 분)의 밀명을 받아 그 뒤를 쫓던 덕임은 홍덕로에게 들켜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 순간 이산이 등장, 본인이 덕임을 불렀다며 구명해주고 동덕회 회합에까지 동참시킨다.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산은 시경 등 경전을 구입해 덕임에게 선물하며 모르는 문장을 필사해 오면 가르쳐 주겠다고 호의를 밝히지만 덕임은 “가벼운 벌울 주셔서 감사하다”고 엉뚱하게 반응한다. “패관소설이나 읽지 말고 경전을 읽으라”는 이산과의 티격태격 끝에 입에 붙은 ‘겸사서’란 호칭이 덕임의 입에서 나오자 이산은 불현듯 덕임과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다.

덕임의 마음 속에 이산은 세손이라기 보단 말장난 주고받던 친근한 겸사서에 가까웠고 그래서 당장 죽일 수도 있다는 이산의 위협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엄한 세손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허물없던 겸사서라면 그의 손에 죽을 리는 없을 테니까.

이산 역시 장난으로 시작한 겸사서 대역을 계속한 이유가 덕임과 서고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특별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고는 “너와 함께 있는 동안 네가 나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네가 나에게 휘둘렸느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휘둘렸느냐?”고 묻는다. 질문의 형식이지만 네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멋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생각시들의 성년식인 계례식날 동궁을 찾은 혜빈은 이산이 덕임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눈치 채고 계례상 순서를 바꿔 이산으로 하여금 덕임이 듣는 자리애서 “궁녀같은 미천한 신분의 여인을 곁에 둘 생각이 없다”고 말하도록 유도한다. 이산으로부터 일종의 고백을 받아 뛰었던 덕임의 가슴은 그런 이산의 말로 인해 차갑게 식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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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자의 기방 출입은 화완옹주(서효림 분)와 그녀의 양자인 백익 정후겸(권현빈 분)에 의해 영조(이덕화 분)에게 고해지고 익위사의 출궁 기록을 확인한 영조는 금족령에 처해진 동궁을 찾아 이산의 뺨을 후려치며 “아니 된다. 네 아비처럼 되면 아니 돼. 여색이나 탐하고 학문은 게을리하고, 혼을 내면 불만이나 품고. 늙은 임금 따위 죽어 없어져라 하는 네 아비 같은 인간이 돼서는 아니 돼! 산아, 너 고칠 수 있어”라며 진노한다.

세손의 참담한 처지를 목도한 덕임은 이산에게 “그저 참을 수밖에 없어 참고 계시옵니까?”라고 질문했고 이산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 참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견디는 것이다. 나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지도 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세손, 나에게 언젠가 힘이 생기면 그 힘으로 수많은 이를 도울 수 있다”고 포부를 밝히며 “넌 그저 곁에 있어다오”라고 당부한다.

이산의 공명정대한 포부에 감동한 덕임은 “일평생 곁을 떠나지 않고 오직 저하의 사람으로서 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저하를 지켜드리겠다”고 충성맹세를 한다.

이산은 덕임에게 여인으로서 곁을 지켜달라 했는데 덕임은 신하로서 곁을 지키겠다고 대답하는 셈이다. 사소한 엇갈림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의빈 성씨는 정조의 후궁 중 유일한 승은 후긍으로 영조 재위(42년) 중인 1766년 세손 이산이 승은을 내리자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이가 없어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후 15년이 지나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이 또한 거부했다가 정조가 그녀의 하인을 벌하려 하자 그제서야 승은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이나 승은을 거부했던 성덕임. 신하를 가르쳤던 왕으로 유명한 정조를 애면글면하게 만들었던 여인임은 분명하다.

또한 정조는 패관소설을 싫어해 1787년 이상황과 김조순이 한원(翰苑)에서 숙직하며 ‘당송백가소설’·‘평산냉연’등의 책을 보다가 발각되자 두 사람에게 오로지 경전에 힘쓰고 잡서를 보지 말라고 한 바 있으며 당대 유행하던 한문문체를 개혁,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환원시키는 문체반정도 시도한 바 있다.

홍국영이 정조의 치세하에 권신으로 부각된 이유 중 하나로 사기(혹은 자치통감 강목) 중 무수리 소생의 영조가 질색하는 부분을 없애 세손의 위기를 구해준 사례가 거론되는데 이같은 야사의 내용을 드라마에선 덕임이 행한 것으로 다뤘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역사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극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얼버무려 실제 역사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순간순간 표변하는 영조의 변덕은 이덕화의 연기로 인해 공포스럽게까지 느껴진다.

/zaitung@osen.co.kr

[사진]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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