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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에 부역' 밀고에 풍비박산난 독립운동가 집안 [박만순의 기억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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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충남 아산군 탕정면 김주원 집안이 겪은 민간인 학살

기세좋게 내려온 인민군이 짧은 인민공화국(인공) 시절을 뒤로 하고 물러나간 1950년 10월 초 충남 아산군 탕정면. 이곳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 2명은 부역 혐의로 양곡창고에 갇힌 뒤 성폭행을 당하고 학살됐다. 그들은 탕정면 용두리 뒷산 방공호에서 죽임을 당했다. 왜 여교사들에게 그런 비극이 닥쳤을까?

6.25 전부터 교편을 잡은 두 여교사는 인민군 점령 시절 인민학교(북한군 점령시의 초등학교)에서도 교사를 지냈다. 인민학교에서는 6.25 전에 가르치던 내용 외에 '북한 정권 찬양'이라는 과제가 추가되었다. 그들은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 그리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상단과 하단에는 청색 줄을 긋고, 가운데에는 붉은 책을 칠했다. 그런 후에 좌측의 가운데에 흰색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붉은 별을 그렸다.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생이 종이에 크레용으로 먼저 그린 후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시켰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 력력히 비쳐 주는 거룩한 자욱 /
(중략) 아 -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북한군이 점령했던 3개월 동안 대한민국 곳곳에서 불린 이 노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다. 특히 초등학생은 의무적으로 배웠으며, 시골의 여성들도 저녁 때마다 여성동맹 간부들에게 배웠다. 한글은 쓸지 몰라도 이 노래는 알았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빨갱이 활동의 증거'로 작용했다. 이 노래를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친 선생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사실 두 명의 여교사가 학살된 이유는 겨우 이런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양곡창고에 구금되어 인권유린을 당하던 그때, 아산군 탕정면에서는 대대적인 '부역혐의자 검거선풍'이 불었다.

부역혐의자 검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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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나온 청동 구슬. 나이 어린 아이도 희생됐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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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면사무소에서 마을 유지회를 개최한답니다. 꼭 오시랍니다"라는 말을 남긴 탕정면사무소 소사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돌렸다. 김기성(1913년)은 피난 갔다 온 지 3일밖에 안 됐지만 관공서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삐죽삐죽 자란 머리카락을 전지가위로 대충 자르고 다음날 면사무소로 향했다. 그렇게 같이 마을에서 나갔던 이들은 저녁에 돌아왔는데, 김기성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김장호(1941년생)는 아버지와 함께 면사무소에 갔던 채두병씨 집으로 갔다. "우리 아버지는 왜 안 오세요?" "지서에 갔다." 면사무소에서 마을 유지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와 "김기성씨, 잠시 지서로 갑시다"라며 데려 갔다는 것이다.

다음날 김기성의 동생 김기홍(1934년생)은 지서로 갔다. 형을 면회한 기홍은 기겁했다. 유치장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온 김기성은 한쪽 눈이 빠져 있었다. "형님 이게 어쩐 일이에요?"라며 손을 잡았는데, 기성의 손이 불덩이였다.

놀란 기홍이 눈물 반 콧물 반 하고 있는데 한 경찰이 나타났다. "어느 놈이 면회시켜 줬어!" 그러더니 다짜고짜 김기홍의 뺨을 때렸다. 평소 김기성과 안면이 있던 청년방위대원이 몰래 면회를 시켜 줬는데, 사달이 난 것이다.

다음날 김기성의 어머니 이혜정(1893년생)이 기홍에게 "형 내복 갖다 줘라"라고 시켰다. 하지만 동생은 형을 만날 수 없었다. 전날 밤인 1950년 10월 10일 자정에 뒷산 방공호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은 유족을 농락했다. 그들은 가족이 어디서 죽었는지 몰라 애타는 유족에게 "쌀 한 가마 가져오면 어디서 죽었는지 알려 주겠다"라고 했다. 유족들은 친인척과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다니기 바빴다. 김기성 집안은 쌀을 융통할 형편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다. 이렇게 김기성은 인민군 주둔 시절 천안으로 피난을 갔다가 온 지 3일 만에 부역혐의로 연행돼 학살당했다.

독립운동가의 손자도 부역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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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원 훈장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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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성은 구한말 청빈정객(淸貧政客)의 후손이다. 김기성의 할아버지 김주원(1872년생)은 구한말 단천군수, 옥과군수를 지내고 승정원에서 일했다.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합병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경성(서울) 정동에 있던 가산을 정리해 중국으로 향했다.

독립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일제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런 연유로 김기성 집안은 아산군 탕정면에서 사대부 집안이자 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유명했다.

김주원의 손자 김기성은 1943년에 일본군 군속으로 갔다가 해방 직전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47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아산군 탕정면 동산리 덕지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무료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명찰을 써주기도 했다. 김기성의 아버지 김재환(1892년생)도 이름을 날린 한학자였다. 김주원은 독립운동가로, 그의 자식과 손주인 김재환과 김기성은 지역의 존경받는 지식인이었다.

이런 집안의 김기성이 왜 '부역혐의'로 죽임을 당했을까?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시절 마을에 있지도 않았다. 처가인 천안으로 피난을 갔다. 김씨 집안을 시샘하던 같은 마을 사람이 부역혐의로 밀고한 것이다. 그는 평소 '사대부 집안'인 김씨 집안을 경원시했고,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아내의 선택

김주원의 아내이자 김기성의 할머니인 이영숙(1874년생)은 자긍심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남편이 집을 팔고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가자 남편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해방 후 자식과 손주가 지역에서 존중받는 인물이 되자 그녀의 자부심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파탄났다. 인민군은 그의 집안이 사대부집안이라며 추방명령을 내렸고 김기성은 처가로 몸을 피했다. 군·경이 수복한 후에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의 고자질로 김기성이 학살되고, 형을 면회 갔던 김기홍도 몰매를 맞았다. 집안에 쌀이 없어 손주의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다. 김기성을 밀고한 마을 사람은 이후에도 김씨 집안을 괴롭혔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옆 마을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이영숙은 '가출'이라는 극약처방을 택했다. 당시 이영숙은 집나이 77세의 상노인이었는데 그런 그가 가출했다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의미다. 그때가 1950년 10월 22일로 손주 김기성이 죽은 지 12일 만이었다. 또 이틀 후인 1950년 10월 24일에는 김장호의 작은어머니가 사망했다. 집안에 비극이 이어졌다.

1950년 4월에 어머니를 여읜 김장호는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었다. 이후 군에 입대한 그는 신원조회에서 비밀인가 취급이 안 나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1968년 일양약품 입사 후에도 연좌제는 그의 삶을 옥죄었다. 1980년대 초 일본에 가는데도 신원조회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정보기관에 가서 서약서와 반공교육을 받고서야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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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김장호 ⓒ 박만순



박만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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