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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주역으로 본 세상](12) 부패와 비리는 왜 대물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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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

정권은 그렇게 출발했다. '전 정권의 부패와 비리, 부조리를 쓸어버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정사정없었다. 검찰을 동원해 탈탈 털었고, 감옥에 잡아넣었다. 청와대 문고리는 뽑혔고, 위세를 자랑했던 인사들도 쇠고랑을 찼다. 국민은 환호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은 아직도 교도소에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긋났다. 적폐 청산을 외치던 바로 그 정권에서도 부패와 비리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조국사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특권 의식을 그대로 보여줬다. 대장동 비리는 권력과 돈이 얽힌 탐욕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LH 사태는 부패가 얼마나 우리들의 삶 가까이 치고 들어왔는지를 보여줬다.

내로남불!

어찌 이 정부만의 일이었겠는가. 새 정권은 전 정권을 짓밟았고, 자기 자신도 뒤이은 정권에 밟혔다. 언제부터인가 '내로남불'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대변하는 말이 됐다.

왜 부패와 비리는 세습되는가? 우리는 그 질곡에서 어떻게 하면 헤어날 수 있겠는가?

중앙일보

주역은 '산풍고' 괘는 '적폐청산'이 '내로남불'로 귀결되는 한국 정치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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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역 18괘 '산풍고(山風蠱)'를 뽑았다. 산을 뜻하는 건(艮, ☶)이 위에 있고, 바람을 상징하는 손(巽, ☴)이 아래에 놓여있다(䷑). 바람이 산 아래에서만 부는 형상이다.

바람은 산 위에서, 또는 중턱을 쓸고 지나가야 만물에 유익하다. 그러나 산 아래 바람은 과실을 떨어뜨리고, 티끌을 일으키는 등 피해만 준다. 혼란하고 스산한 상태, 길(吉)함이 없다.

괘 이름 '蠱(고)'자가 흥미롭다. 쟁반(皿) 위에 벌레(虫)가 우글우글 모여있는 모습이다. 쟁반은 음식을 담는다. 그 음식이 썩으면 벌레가 꼬인다. '蠱'자는 바로 그걸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주역 '산풍고'는 흔히 '부패의 괘'라고 불린다.

'蠱'은 벌레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벌레다. 벌레 여러 마리를 한 병에 담아 놓으면 자기들끼리 먹고 먹힌다. 그 싸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벌레, 그놈을 바로 '蠱'이라고 했다. 그만큼 부패는 강성하고 뿌리 깊다. 오죽했으면 5000년 전 주역이 '蠱'를 괘 이름을 정하고, 부패를 다뤘겠는가.

썩은 냄새가 풀풀, 그러나 주역은 '산풍고'괘를 긍정적으로 본다. '크게 형통하고, 대하(大河)를 건너기에 충분하다(元亨, 利涉大川)'고 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개혁으로써 부패를 일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풍고'는 '부패의 괘'이자 '개혁의 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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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째 '산풍고'는 흔히 '부패의 괘'로 불린다


先甲三日, 後甲三日

'산풍고'의 괘사(卦辭)는 이렇게 시작한다. 甲(갑)은 새로운 순환의 시작점이다. 일을 시작함에 3일 전을 봐야 하고, 3일 후를 또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패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썩어 문드러져 표면화되는 게 부패다. 이제 어느 정도 잡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다시 살아난다(終則有始). 그러기에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살피고, 또한 미래를 감안해야 한다. 어제 부패만 때려잡는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부패가 자라날 테니 말이다. 훗날 되살아나지 않도록 미리미리 단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패 척결은 칼이 아닌 법률로 완성해야 한다.

'산풍고' 괘는 효사(爻辭)를 통해 전 대(代)의 부패를 바로잡는 일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 대의 부패에 대해 관대하면 결국 자신 스스로 무엇도 이룰 수 없다(裕父之蠱, 往未得也)'라고도 했다. 전임자의 부패와 비리, 부조리를 끊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당연히 엄격하게 사정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적폐, 너 죽어 봐라'라는 식의 보복 사정으로는 곤란하다. 효사는 '선대의 부패를 자식이 바로잡는다면 아버지의 허물도 벗겨질 것이오, 또한 앞으로도 길할 것이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허물을 벗겨드린다'라는 마음으로 부패 척결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힘만이 능사는 아니다. 주역은 오직 강함으로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중용으로써 부패 척결에 나서라고 했다. '모두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은 승계해야 한다(承以德也)'라고도 썼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 정책을 뒤집고, 전 정권 사람은 능력에 관계없이 쫓아내는 악순환을 경계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지막 효사다.

'不事王候, 高尙其事'

'왕과 제후를 섬기지 마라, 고상함을 유지해 그 뜻을 지켜라'

전 정권의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은 마무리했다고 치자. 그다음이 문제다. 주역은 '깨끗하게 물러서라'고 충고하고 있다. 왕이나 제후 주변에 머물면서 단물 빨지 말고 물러나라는 얘기다. 자리 차고 앉아 있으면 또다시 부패의 온상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권력이 머물면 부패는 꼬이기 마련이다. 썩은 것 도려내고, 내가 그 자리를 채운다 한들 내가 썩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다. 주역은 그걸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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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고(蠱)'괘는 그릇 위에 벌레가 득실거리는 형상이다.


주역의 '부패 철학'은 노자(老子)에 이어진다. 노자의 '도덕경' 제2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功成而弗居, 夫惟弗居, 是以不去'

'공을 이룬 후 남지 마라, 오직 떠나는 것만이 잃지 않는 길이다.'

개혁을 말하는 자, 자리에 탐내지 말라는 얘기다. 권력의 단물에 혀를 대는 순간, 그 역시 훗날 사정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패와 비리, 부조리의 대물림 구조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다.

이 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누가 차기 권력을 잡든 그 지옥 같은 부패와 권력형 비리의 대물림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교도소의 방 한 칸만 줄어들 뿐이다!

한우덕/차이나랩 대표 wood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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