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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택배 일 하시던 아버지...’도 못 쓴다, 고민정이 덕본 블라인드 정말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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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고민정이 덕 봤다는 블라인드

현장에선 불만 나오는 이유

조선일보

16일 서울 광진구에서 열린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면접자가 VR면접을 체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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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블라인드 테스트로 KBS에 입사한 경험이 있어 법제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 저는 당시 분교였던 경희대 수원캠퍼스를 졸업했지만 이 제도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지난 13일 소셜미디어에 ‘공공기관 공정채용법 제정안(블라인드 채용법)’ 법안 발의를 예고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학생회와 재학생들은 경희대 수원캠퍼스(현 국제캠퍼스)는 분교가 아닌 이원화 캠퍼스이며 “모교를 블라인드 채용 제도 아니면 취업조차 힘들었던 대학으로 폄하시켰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분교’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블라인드 채용이 진정한 공정인지 제도의 실효성이 또 한번 도마에 올랐다.

블라인드 채용은 2017년 하반기부터 공공 기관에 전면 도입됐다. 입사 지원서에 출신지, 출신 학교, 가족 관계, 성별 등을 적지 못하게 하고 직무 능력 중심으로 선발하자는 취지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캐나다·독일·영국 등 해외에서도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제도 도입 후 효과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공정채용정책 현장 실태 조사 및 정책 이슈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공공 기관 340곳 중 253곳의 2016~2019년 신규 채용 현황을 연구한 결과,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 비율은 2016년 8%에서 2019년 5.3%로 감소했다. 이는 2017년부터 블라인드 채용과 지역 인재 할당제를 도입한 효과가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여성 채용 비율은 2016년 34%에서 2019년 39%로 증가했고, 비수도권 대학 출신 비율은 43.7%에서 53.1%로 늘었다.

그럼에도 현장에선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공공기관 채용정책에 대한 연구’는 출신 학교·전공까지 블라인드로 처리해 면접 비중이 강화되면서 직무 역량보다는 면접에서 말을 잘하거나 순발력 있는 사람이 선발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보고서에서 한 공공 기관 채용 담당자는 “ICT(정보 통신 기술) 직무를 수행할 인재를 채용해야 하는데 합격자가 전부 상경 계열 출신인 적도 있었다”면서 “지원자들이 짧은 면접 동안 대답만 잘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구를 수행한 민경률 연구위원은 “논술 등의 필기 전형도 인문계 출신 지원자에게 유리하다 보니 이공계 출신 합격자 비율이 줄었다는 답변도 있었다”면서 “연구원을 뽑을 때는 전공이나 석·박사 졸업 여부 정도는 공개하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높다”고 했다.

공공기관 채용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대학 입시에서도 블라인드 제도가 확대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해부터 서류 평가에서 출신 고등학교 정보를 알 수 없도록 하는 ‘고교 정보 블라인드 평가’를 도입했다. 교외 수상 실적조차 알 수 없고, 자기소개서 비중도 점차 줄이는 상황에서 “도대체 뭘 보고 뽑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우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학교마다 배우는 과목, 심화 교육 여부, 학생 수준이 다른데 내신 성적만 놓고 학업 역량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자기소개서 분량도 줄어드는 데다 비교과에서도 의미 있는 교외 수상 실적을 제외해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듯이 숨은 정보를 찾아내야 하는 거죠.”

자기소개서 같은 정성 평가 비중이 줄면 시험 성적 등의 정량 지표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진정한 공정이냐는 의문도 남는다. 올해 신임 판사 임용에서 김앤장 법률사무소 출신 변호사가 20명이나 뽑히자 대법원은 “출신 대학과 로스쿨, 출신 로펌을 가린 블라인드 형식으로 심사했다”고 해명했다. 올해 전국 로스쿨 신입생의 91%도 31세 이하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로스쿨 입시 제도에서 학점, 리트 점수, 영어 점수 등 정량 지표를 강화한 결과로 보고 있다.

블라인드 제도가 부모나 출신 학교의 ‘후광 효과’를 가릴 수 있지만, 반대로 교육 여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의 배경까지 감안할 수 없게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로스쿨의 한 교수는 “이제는 ‘택배 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도와’라거나,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부도로’ 같은 말도 쓸 수가 없다”면서 “여러 제약 때문에 자기소개서에 풍부한 이야기가 담기지 못하고 천편일률이라 어떤 학생인지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출신 학교를 가리는 블라인드 제도가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있다.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서울 소재 대학 졸업생 박모(27)씨는 “학벌도 성실성과 인내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평가 지표라고 생각한다”면서 “지원할 때 메일을 학교 메일로 쓰거나 면접 볼 때 관악, 안암, 신촌 등 학교가 소재한 지역을 은근히 드러내는 꼼수도 봤다”고 했다.

한국인사행정학회장인 진종순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는 “학벌 중심의 채용 방식은 바뀌어야 하지만 다른 평가 요소 비율을 늘리는 등의 대안이 존재한다”면서 “채용 방식을 정교하게 만드는 대신 개인이 노력해온 이력을 백지 상태로 돌려버리는 건 또 다른 불공정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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