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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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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만화가 TV 나오는데…" 허영만이 돌아서서 밥먹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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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만에 복간 '날아라 슈퍼보드' 허영만 화백

중앙일보

1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허영만 화백.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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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키치키 차캬차캬 초코초코초"

설령 만화를 잘 모르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대사는 허영만 화백의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손오공이 변신을 할 때 외우는 주문이다. 지금은 '타짜' 같은 성인만화로 더 유명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허 화백은 어린이의 우상이었다.

1988년 만화잡지 '만화왕국'에서 첫선을 보인 '날아라 슈퍼보드(초기엔 '미스터 손')'는 근두운 대신 슈퍼보드를 타고, 여의봉 대신 쌍절곤을 휘두르는 손오공을 등장시켜 화제가 됐다. 현대적 손오공의 모습은 20세기 키즈들을 매료시켰고, 그 인기에 힘입어 1992년 KBS에서 방영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은 시청률 42.8%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아라 슈퍼보드'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기억하는 이는 없다. 1993년 '만화왕국'의 폐간과 함께 미완성인 채로 끝났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날아라 슈퍼보드'가 최근 26년 만에 만화(전 10권)로 복간됐다. 출판사 가디언 측은 "잡지가 갑자기 폐간되면서 단행본도 힘을 받지 못하고 절판됐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아 다시 만들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20여년 만에 복간본을 낸 허 화백을 15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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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허영만 화백.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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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많은 작품 중에 왜 '서유기'를 택했나.

A : A : =작품 자체가 정말 만화적인 이야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박기당씨가 그린 『손오공』 양장본을 선물로 받아서 읽고 완전히 빠져들었다. 당시 머리에 남아있던 것을 재해석해서 만화로 그려보자는 생각을 하다가, 새로 창간된 '만화 왕국'에 제안한 것이다.

Q : 스케이트보드와 헬멧, 쌍절곤 등의 아이템이 화제가 됐다.

A : A : =당시 한강 고수부지에서 아이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많이 탔다. 그때 우리 애들이 헬멧을 쓰고 다니는 걸 보면서 구상했다. 그런데 헬멧을 계속 쓰면 머리가 얼마나 가렵나. 그래서 그 위에 작대기를 하나 꽂았다.

Q : 애니메이션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시청률 42.8%는 현재까지도 애니메이션 최고 기록이다.

A : A : =당시 저녁을 먹으러 가면 식당마다 TV에서 '날아라 슈퍼보드'가 보였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너무 엉터리였다.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돌아앉아서 밥을 먹었다. 이를테면 슈퍼보드가 날아가거나 쌍절곤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속도감이나 타격감, 액션 등이 전혀 살지 않았다. 당시 극화 수준이 낮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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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날아라 슈퍼보드'를 기업 광고에 활용한 SK이노베이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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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래도 애니메이션으로 돈은 많이 벌었겠다.

A : A : =그때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작가는 별로 받지 못했다. 200만~300만원 정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률이 아무리 올라도 인센티브 같은 것도 없었다. 오히려 만화잡지에선 A급 대우를 해줬으니 거기서 더 많이 받았다.

Q : 만화 잡지의 전성기인 1980~1990년대 최고의 작가로 군림했다. 어느 정도 벌었나.

A : A : =그때 탑은 이상무 화백이고, 조금 뒤에는 이현세 화백이 있었다. 난 항상 2등이었다. 2등도 괜찮다. 그 정도면 편집자가 작품에 대해 간섭을 안 하거든 (웃음). 너무 오래되어서 그때 정확히 얼마를 벌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문하생 시절부터 일을 잘해서 남들보다 2배 정도 받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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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 화백의 동명의 만화를 영화로 만든 '식객'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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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동시대 화백들과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식객’ 등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

A : A : =1990년대 이후 실력을 갖춘 신인들이 많이 나왔다. 그때 나는 40대였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짐을 싸 들고 마석에 가서 1년간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미술품을 모작하는 내용의 일본 만화를 봤는데, '세상에 이런 만화를 그리다니…' 충격이었다. 솔직히 대다수의 한국 만화가들은 책상 속에서 머리만 굴려서 그렸다. 그런데 일본 만화가들은 취재를 하면서 만화 속에 어마어마한 정보를 넣더라. 만화책을 돈 내고 봐도 그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때 든 생각이 '남들과 똑같이 하면 안 된다. 현장감을 살리고 정보를 넣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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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허영만 화백.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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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취재 중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A : A : ='세일즈맨'을 처음 취재할 때는 대우자동차 문래동 영업소에 갔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거기 소장이 자동차를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판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을 취재하고 부족한 건 일본 노무라 증권에서 나온 세일즈 관련 책을 구해 읽기도 했다. '타짜' 때는 실제로 지리산에 내려가서 도박에서 은퇴한 두 사람을 취재했다. 그들이 기술을 부리는데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일일이 보고 그렸다.

Q : '식객', '타짜', '미스터 큐' 등 유독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는 작품이 많다. 이유가 뭘까.

A : A : =내 작품에는 '슈퍼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 동네에서 흔히 만날 법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다 보니 방송이나 영화에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한 것 같다.

복간된 '날아라 슈퍼보드'는 미완성 그대로다. 요괴에게 납치된 삼장법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멈췄다.

Q : 미완으로 마친 부분부터 다시 이어나갈 계획은 없었나?

A : A : =지금은 안 된다. 연재 당시엔 우리 애들을 보면 소재가 나왔다. 그런데 걔들이 이제는 술·담배도 하는 성인이 됐기 때문에 어렵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이 상태에서 마무리해야지 더 건드리면 안 된다.

허 화백은 10권 마지막 페이지에 "성품이 너무 좋아 매번 마귀들의 함정에 걸려 납치되기 일쑤인 삼장법사이지만, 미스터 손이 구하러 올 때까지 잘 이겨낼 것입니다. 다시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미스터 손, 저팔계, 사오정을 앞세우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라는 작가의 말을 남겼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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