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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36.5˚C]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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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국일보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24년까지 전 세계 무국적자 문제를 종식하겠다는 목표로 '#IBELONG'(나는 소속돼 있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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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론을 가르치던 대학 교수님은 “강의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미국에서 노숙인이 되는 게 당장의 소득을 올리는 더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국민소득이 앞서는 나라를 추월해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든 비유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2만6,875달러로 미국(4만6,234달러)의 절반 정도이던 때다.

몇 해 전 미국 출장길에 만난 한 교민은 “어렵게 왔으니 돌아가지 말고 남으라”고 권했다. 불법체류자라도 근교 닭공장에서 일하며 납세실적만 쌓으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잔디마당이 딸린 타운하우스에 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도 내 집 마련도 쉽지 않은 현실에 치여 물려줄 만한 유산이 없는 부모님을 괜히 탓하며 사는 것보다 낫지 싶었다. 아메리칸 드림에 혹했던 순간이다.

기회의 땅 미국으로 누구보다 먼저 간 건 입양아들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수십만 명이 보내졌다. 세계 1위 고아 수출국 한국은 악착같이 보냈다. 버터 바른 빵과 스테이크를 먹으며 자라길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이들 중 최소 4만3,830명은 지금껏 무국적자 신세다. 무국적 한인 입양인 다수는 어린 시절 양부모로부터 받은 방임과 학대부터 말했다. 학교를 못 다니고 직업도 구할 수 없어 노숙인으로 살다 불법체류자로 한국으로 강제 추방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물건처럼 팔려갔다” “너희 나라(한국)가 내 삶을 부쉈다”며 울분을 토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았다 무국적 노숙인 신세가 된 화교 탈북자들도 있다. 분단이 되기 전부터 수 세대 동안 이곳에 살았던 그들은 한국에선 화교라는 이유로 탈북민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고, 중국에선 탈북민이라고 배척당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본국과 모국인 한국 어디에서도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중앙아시아 무국적 고려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식민지배와 내전이라는 역사의 희생자인 이들 무국적자는 전 세계에 걸쳐 417만6,398명에 달한다.

유럽 무국적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집시는 과거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됐다. 유대인과 함께 열등한 민족이라는 이유에서다. 1935년 제정한, 독일 혈통에만 시민권(국적)을 부여하는 시민법(뉘른베르크법)이 탄압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가 됐다. 417만여 명의 무국적자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있지만 없는' 존재로 지워도록 방치하는 지금의 국적법이 그때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한때 무국적자였다. 모국인 스위스가 뒤늦게 국적을 주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화가 마르크 샤갈, 영화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도 무국적자였다. 1954년 흑백 아동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미 대법원 수석판사 얼 워런은 “무국적은 고문보다 더한 형벌”이라고 했다.

세계 각국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모든 사람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화는 없다. 국가가 무언가 해줄 일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모든 사람에게 국적을 주는 일이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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