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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스토킹을 '오죽 좋으면 그랬겠냐'고 말하는 이들에게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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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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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시작한 첫 연애였고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났다.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여서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자는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로 인한 단발성 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빈도와 정도가 심해지고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이별을 마음먹었다. 하지만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남자는 공황장애를 호소하거나 수백 통의 문자와 전화로 집착을 드러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회사 등에 일방적으로 찾아오고 주변 물건을 부수면서 만남을 지속해달라고 요구했다. "네가 오죽 좋으면 그러겠냐"는 주변의 말에 경찰신고는 생각도 못했고, 어느 순간 체념한 듯 남자의 폭력을 수용했다.

일상을 무너뜨리는 지속적인 폭력 앞에서 그녀는 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 경찰에 신고하는 등 좀 더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조기에 법적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을까? 혹자는 스토킹한 남성도 잘못했지만 어설프게 대응한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당시 스토킹은 경범죄처벌법상의 '지속적 괴롭힘'으로 최대 벌금 10만 원 정도로 처벌받는 행위에 불과했다. 신고하더라도 대응의 법적 근거가 약하기 때문에 경찰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니 경찰 신고는 공연히 상대를 자극해 자신을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할 뿐인 것이었다. 그녀에겐 공적으로 행사할 마땅한 공격과 방어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도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수백 통의 일방적 연락에도 그녀가 이별을 번복해주지 않자 집 앞에 찾아왔고, 소란으로 이웃에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올라가서 얘기하자더니 집 안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처음엔 애걸하다가 어느 순간 돌변하여 엄청난 폭력성을 드러내는 성향임을 알기에, 그녀는 최대한 남자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남자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고 어느 순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살기 위해"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흔들면서 핸드폰을 돌려달라고 왜 때리느냐고 소리쳤다. 남자는 핸드폰으로 칼을 든 그녀의 모습을 촬영했고, 이 장면 하나로 그녀에게는 특수폭행 벌금형이 확정됐다. 그렇게 그녀의 첫 방어행위는 상대를 가해한 '범죄'가 되었다.

스토킹은 강력범죄의 전조증상인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발생한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에서도 범인 김태현은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피해자가 자신과의 만남을 피하자 스토킹을 일삼다 범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토킹이 강력범죄로 비화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사회적 방치'가 있다. 첫째는 스토킹을 당해도 법적 처벌이 약해 피해자가 사법적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입법적 방치이다. 이 문제는 최근 22년 만에 '스토킹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해 일단 해결의 첫 단추를 끼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는 "오죽 좋으면 그러겠냐"며 '가해자의 선한 동기'에 감정이입하며 피해자의 고통과 공포를 과소평가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다. 이런 주변 시선 때문에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사회문화적으로 방치되어 하소연할 곳조차 찾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깊은 고립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난 10월 21일부터 시행중인 스토킹처벌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회적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스토킹의 본질은 '과도한 애정표현'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자기중심적 감정배치와 좌절의 원인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폭력'이다.
한국일보

박수진_아침을 열며_필진사진


박수진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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