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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워싱턴 평양선 시큰둥한데…남한은 왜 '종전선언' 재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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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포커스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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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언급한 이후 북핵 협상보다 종전선언 자체가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이 최근 극초음속미사일,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도발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한반도 종전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문재인정부 외교안보라인이 총동원돼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종전선언이 신뢰 구축을 위한 정치적·상징적 조치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종전선언이 갖는 외교·안보·군사적 함의는 그보다 훨씬 깊다.

◆ 미·일·중 동상이몽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내 주한미군사령부에는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을 일시 중지하는 정전협정 서명 때 쓰였던 나무책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펑더화이 중공군 사령관이 최종 서명하면서 그 후 약 70년간 한반도의 운명을 지배해왔던 정전협정이 이 책상에서 나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국군 대표 서명은 여기에 없다.

그로부터 70년, 문 대통령은 이 낡은 서류를 바꿀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종전선언에 대한 간극은 매우 크다. 종전선언 당사자인 미국은 종전선언이 북한 김정은과 직접 대화하던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 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외교와 억지력(diplomacy and deterrence)'과도 들어맞지 않는다. 최근까지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종전선언을 논의했던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종전선언을 언급할 때마다 "한국의 종전선언 제안"이라고 표현하면서 아직까지 우리 측 '제안'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기 위해 종전선언이 미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은 아니다. 조건 없는 대화를 시종일관 강조해왔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 상황에서도 정부 일각에서는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슬쩍 흘리고 있지만 미국은 '제재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이라며 제재 완화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은 종전선언보다 제재를 통한 억지력 강화와 대화를 통한 외교, 이 두 트랙으로 북한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데 무게가 실려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 우리 입장에서는 러시아 등 주변국들에까지 종전선언 필요성을 설득하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에 유리한 고지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려 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시종일관 종전선언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시해왔다. 미·북 대화가 한창이던 2018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은 "한반도 전쟁 상태를 종결하고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 정치적 해결의 중요한 부분이자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기대"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으로서 종전선언에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종전선언 논의가 한미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불만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현상 유지가 최대 목표인 일본은 입장이 다르다. 종전선언으로 한반도 상황이 변화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전협정 당사국이 아닌 일본이 종전선언에 자국 입장을 개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입김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일 한·미·일 북핵수석대표와 정보수장이 각각 워싱턴과 서울에서 회동하면서 종전선언에 대한 논의가 오간 것도 이런 맥락이다.

◆ 남북 간 큰 견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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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북한은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종잇장에 불과하다"며 걷어차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다음날 곧바로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김 부부장은 또 "애써 웃음 지으며 종전선언문이나 낭독하는 것이 누구에게는 간절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가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이 조건을 달았다는 것은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종전선언에 대한 무게는 한국과 큰 차이가 있다. 북한은 대화 선결 조건으로 한미를 향해 이중잣대와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어 종전선언이 대화에 큰 동기부여가 못 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내놓은 입장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을 두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게다가 종전선언을 둘러싸고 남북 간 입장을 주고받는 와중에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차례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지난 19일 SLBM까지 9~10월에만 무려 5차례다.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종전선언이 조만간 체결될 가능성은 낮다"며 "중국도 찬성하고 미국과도 대화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북한이 이중잣대 철회라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으니 결과를 내기 힘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 주한미군 철수 우려


정부는 종전선언은 정치적·상징적 조치일 뿐이며 법적으로는 현재 정전체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정전체제 변경은 유엔사령부를 무력화하고 평화협정 체결은 한미연합사령부와 주한미군 지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종전선언 이후에 대한 군사적 상황 예측과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과 대립구도 속에서 주둔군 재배치의 밑그림을 짜고 있다는 점도 종전선언과는 무관하지 않다.

폴 러캐머라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5월 상원 청문회에서 "주한미군은 인도태평양사령관에게 역외 긴급 상황과 역내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옵션을 만드는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종전선언 결과 미군 재배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종전선언 이후 한반도에서 북한의 위협이 (최소한) 완화되면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재검토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주한미군을 활용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연히 한미연합사는 물론 유엔군사령부의 역할에 대한 의문부호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한미연합사나 유엔사는 향후 종전선언의 문구에 따라 구체적인 지위가 결정될 것"이라면서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이자 대화를 위한 입구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정전협정을 집행하는 게 임무로 되어 있는 유엔사의 지위에 대해서는 상당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미연합사령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국 견제에 한미연합사가 동원되는 것을 기피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미국 측은 동맹의 역할을 요구할 수 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이를 악용해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가능성이 충분하고, 여기에 동조할 국내외 행위자들도 많다"고 내다봤다.

◆ 외국의 종전 절차


한반도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전쟁을 끝마칠 때 어떤 절차를 거쳤을까? 일반적으로 정전 또는 휴전 상태에서 평화로 전환하는 방법은 평화협정(peace treaty)을 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쟁종식 선언, 전쟁 배상, 전후 처리, 평화 정착 등을 포함하고 양자 또는 다자 형식으로 체결된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경우 종전선언 또는 종전협정을 거칠 수도 있다. 종전선언에 의해 전쟁의 종료를 선언한 후 신뢰 구축 과정을 통해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는 휴전 또는 정전 이후 곧바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1917년 12월에는 러시아와 동맹국(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간 휴전이 있었다. 이후 약 1년 뒤인 1918년 11월 11일에는 독일제국이 협상국(영국·프랑스·미국 등)과 제1차 콩피에뉴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을 공식적인 적대행위 종결로 본다.

[한예경 기자 / 최희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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