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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고시원 유령’ 세상으로 불러낸 주거복지, 시장님 생각대로 지속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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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A씨(51)는 자녀 6명을 둔 영세자영업자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10살이 채 안된 두 자녀를 가게에 데리고 다녔다. 식자재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배달하러 갈 때도 아이들을 트럭에 태워 함께 움직였다. 어린 자녀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4년 전 카드대출 등 빚 1억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방 한 칸짜리 집에는 부엌이 따로 없어 휴대용 버너로 식사를 챙겼다. 주거기본법이 정한 최저주거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현재 A씨 가족은 단칸방을 벗어났다. 서울시 주거복지센터가 제공한 ‘긴급주택’을 거쳐 지금은 20년 동안 거주할 수 있는 매입임대주택에 산다. 긴급주택은 장기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찾을 때까지 사는 ‘중간거처’로, 당장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곳이다. 서울 25개 주거복지센터 중 13개 센터가 긴급주택을 운영 중이다. 이 곳에 6개월~1년가량 머물면서 장기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찾게 된다.

주거복지센터의 역할은 주거상향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대상자의 재정·건강·심리·가족관계 등 상태를 두루 살펴 필요한 지원방법을 연계한다. A씨의 경우 일터에 자녀들을 동반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역아동센터와 연계해 돌봄을 지원했다. B씨(30)는 한달 47만원 수입으로 강서구의 한 고시원에 살다가 강서주거복지센터의 지원을 받아 직업과 금전관리 교육을 받았다. 광진주거복지센터가 지원한 미혼모 C씨(23)는 임신 당시 고시원에 살다가 긴급주택으로 옮겼고, 출산 후 산모·신생아 돌봄서비스를 받았다. 지역 사회적기업은 아이의 백일상차림과 기념촬영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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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을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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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주거복지 네트워크’ 무너질까 우려

집수리, 이사비, 가구, 생필품까지 다방면에 걸친 지원은 각 지역 주거복지센터가 구축한 ‘네트워크’ 때문에 가능하다. 지역사회에서 오래 활동하며 다양한 기업, 기관, 단체들과 쌓은 관계망에서 자원이 나온다.

김송희 구로주거복지센터장은 과거 지역자활센터에서 15년간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위기가구를 구청·동 주민센터부터 복지관, 민간 구호단체, 사회적기업·협동조합까지 엮어 빈틈없이 지원할 수 있는 배경이다. 위기가구를 발굴하는 것도 제보를 주고 받는 관계망에서 시작된다. 평소 꾸준히 접촉해온 동네 슈퍼마켓이나 미용실 같은 가게도 ‘정보원’ 역할을 한다.

서울 25개 주거복지센터 중 민간 비영리법인이 운영하는 16개 센터는 최근 이 같은 관계망이 끊길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서울시가 주거복지센터처럼 민간에 위탁한 사업을 두고 대부분 직영화나 수탁기관 변경을 검토 중이기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지난 9월 두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민간위탁 사업 구조를 “시민단체형 다단계” “시민단체 전용 ATM기”라고 규정한 뒤 시작된 일이다.

서울시는 민간이 운영하는 16개 주거복지센터도 다른 9개 센터처럼 일괄적으로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두영 관악주거복지센터장은 “한 동네에서 시간을 두고 신뢰를 얻어왔기 때문에 여러 자원연계가 가능한 건데, 그 ‘신뢰기관’이 사라지면 연계가 끊겨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당장 주거복지 재원이 사라질 수 있는 점을 지적한다. 민간 운영 센터 16곳은 후원금을 받는다. 올 상반기 후원금은 3억원에 육박한다. 서울시가 지원한 사업비 1억4000만원보다 2배 이상 많은 금액이다. 같은 기간 민간과 SH공사 운영 센터가 각각 서울시로부터 받은 사업비는 한 곳당 평균 860만원, 1010만원이지만 후원금까지 합하면 2730만원, 1630만원으로 역전되는 이유다. 김선미 성북주거복지센터장은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임대료 체납 문제로 지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며 “후원금을 쥐어짜고 외부기관 지원을 신청해서 다 메우는 중인데 이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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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집과 이웃을 표현한 삽화.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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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으로 나아가는 ‘고시촌의 도전’도 불투명

민간 특유의 유연성이나 활력이 사라질 것이라고도 이들은 우려한다. 관악주거복지센터가 지난해부터 대학동에서 구축한 ‘고시원 공동체’가 대표적이다. 단순히 지원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립 기반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주거복지 사업을 한층 발전시킨 형태다. 대학동엔 중·장년 남성 1인 가구가 많은데, 주거상향이 절실하면서도 한편으론 ‘고시원 총무’ 정도가 사회적 관계망의 전부여서 지역을 떠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관악주거복지센터는 대학동에 별도 사무소를 차린 뒤 지역 의료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과 함께 150여 가구를 대상으로 주거는 물론 심리적 건강, 일자리에도 초점을 맞춘 복합적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서울시 ‘마을관리소’ 사업도 따냈다. 하지만 관악주거복지센터의 앞날처럼 이 사업의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정두영 센터장은 “고시원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고 있던 분들을 세상으로 끌어내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갖추도록 하는 게 목표”라며 “주민이 다른 주민을 계속 참여시키면서 50여명이 150여명까지 불었는데 여기서 끝날 수도 있게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간 주거복지센터들은 서울시가 기존 관계망을 끊을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서울시엔 원래 수탁기관 변경 후 기존 인력 80%를 고용승계하는 지침이 있었지만, 오 시장이 이를 “특권”이라고 한 뒤 25%만 승계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수탁기관이 바뀌면 일하는 사람들도 바뀌게 된다.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보유한 네트워크는 대체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지역주거복지센터 종합평가표를 보면 모든 주거복지센터 종합평가 점수는 평균 90.54점이다. 민간 평균은 90.22점, SH공사 평균은 91.08점으로 근소하게 차이난다. 한 주거복지센터 관계자는 “과도한 ‘전임시장 흔적 지우기’로 주거복지센터까지 민간위탁을 철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거복지센터 위탁 변경과 관련해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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