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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문재인 정부의 '헤일메리 패스'...왜 지금 종전선언인가 [뉴스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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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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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의 종전선언을 제안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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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종전선언을 또 다시 공개 제안한 이후 정부는 외교력을 총동원해 미국 설득 작업에 나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 임기 막바지 최대 역점사업이 된 듯한 분위기다. 최근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미국 방문, 한·미·일 정보수장 회동 등에서도 한국이 가장 비중을 둔 것은 종전선언이었다. 종전선언에 대한 한·미 간 시각 차이는 물론 북·미의 생각도 크게 다르기 때문에 성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정부가 종전선언을 강력히 추진하는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분석과 관측이 제기된다.

■국내정치적 요인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다시 꺼냈을 때 의아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이미 시도했다가 무산됐던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현재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종전선언의 재등장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현재 남북관계는 최저점에 이른 상태다. 북·미 대화 재개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고 국제사회가 보는 한반도 정세는 남북의 미사일 발사로 비롯된 군비경쟁 양상이다. 이 상태에서는 정부가 북한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밝힌 것처럼 정부는 남북관계 카드를 모두 소진한 상태다. 하지만 북한 문제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임기 끝까지 붙잡고 시도해볼 만한 카드는 이미 실패하긴 했지만 종전선언만한 것이 없다.

정부의 종전선언 재추진 배경에는 이 같은 국내정치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 진전에 성과를 거두게 되면 업적으로 남길 수 있고, 성과가 없더라도 종전선언 성사를 위해 정부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외교소식통은 “미국이 한국 정부의 종전선언 제안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도 국내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기나 조건 등을 따져봤을 때 효과는 물론 성사 여부도 불투명한 종전선언을 한국 정부가 강하게 추진하는 배경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일 메리 패스

종전선언 논의가 빠르게 진전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은 정부도 알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지난달 25일 담화에서 “종전선언은 흥미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언급한 것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적대시 정책과 이중기준 철회’라는 조건이 결정적 장애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청와대의 기류는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해볼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미식축구에서 경기를 뒤지고 있는 팀이 경기 종료 직전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엔드존에 긴 패스를 던져넣는 마지막 시도를 ‘헤일 메리(hail mary·아베마리아) 패스’라고 한다. 청와대의 종전선언 추진은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마지막으로 시도해 보는 헤일 메리 패스의 성격이 강하다.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태에 빠뜨린 정부라는 불명예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소한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을 차기 정부에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 설명의 모순

정부는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며 법적·제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게 이 논리가 먹히지 않는 이유는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치적 선언이라고 해도 정상 간 공개 선언에 구속력이 없을 수는 없다. 전직 정부 관료는 “정식 조약도 아니고 장관급에서 발표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함부로 뒤집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정상들이 모여 함께 선언한 것에 외교적 구속 효과가 왜 없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종전선언이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라면 추진 자체가 무의미하다. 정부가 종전선언에 집착하는 이유도 ‘한번 선언하면 누구도 배에서 뛰어내리기 어려운’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북·미를 대화의 트랙에 묶어두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정부의 설명대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면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종전선언’을 북한이 받을 리 없다.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김지영 편집국장은 지난 16일 도쿄의 한 국제 심포지움에서 “(북한은) 싱가포르 공동선언의 이행 노력이 중단된 시점에서 정치 선언에 불과한 종전 선언을 채택하는 것은 조선반도 정세 안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으로 잘못 이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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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6일(현지시간) 언론 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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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부동 미국, 조건 강화한 북한

종전선언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정세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의지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사되려면 국제적 지지, 특히 핵심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이 호응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은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됐던 2006년 11월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는 “미국 측의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설명하지만 미국 측의 관련 언급에서는 그런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동맹국의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외교적 수사’로 대응하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26일 종전선언 관련 질문에 “각각의 단계에 대한 정확한 순서·시기·조건에서 한국과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며 “다만 핵심적인 전략적 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한 것은 종전선언에 대한 전형적인 미국의 화법을 약간 더 구체적으로 바꾼 것이다.

북한 역시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감은 없다. 오히려 북한의 입장은 더 강경해지고 있다. 원래 북한은 비핵화조치와 교환하는 것이 아닌, ‘조건 없는 종전선언’이라면 수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김여정 부부장 담화를 통해 ‘적대시정책과 이중기준 철회’를 새로운 조건으로 내걸었다. 원래 입장보다 더 멀어진 셈이다. 특히 적대시정책 철회는 과거 핵포기 조건으로 제시하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대화 재개 또는 종전선언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입장은 날이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핵문제에 대한 한·미 협의에 관여했던 전직 고위관료는 “북·미 간 입장 차이 때문에 종전선언은 실효성 여부를 떠나 성사될 사안이 아니므로 다른 방향의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정부가 무리임을 알면서 계속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것은 한국의 외교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한·미 관계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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