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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만물상] ‘물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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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본 기자가 한국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인씨”라고 했다가 방송국이 수난을 당했다. 대통령 지지자들이 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대통령 별명이라도 말했으면 프로그램이 폐지됐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방송에서 대통령 별명을 말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공약으로 “대통령을 개그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한 이후다.

조선일보

만물상 삽입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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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우’는 노 대통령의 약한 리더십을 풍자했다. 허(虛)태우, 속태우, 애태우 등 아류작까지 나왔다. 대통령이 강하게 나서면 “불태우”라고 했다. 나중에 비자금 문제가 생기자 “돈태우”라고 했다. 당시 개그맨 김형곤은 물태우 리더십을 이렇게 놀렸다. 대통령이 회의에서 방귀를 뀌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임자도 뀌어”라며 밑에 권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부하들이 먼저 “내가 뀌었다”며 나선다. 노 대통령은 “네가 뀌었제?” 하고 밑에 덮어씌우려는데 부하들이 “누가 방귀를 대신 뀌어줍니까?”라며 대든다.

▶노 대통령은 늘 평범했다고 한다. 권력 2인자로 부상했을 때 중학교 동창생들이 모여 그의 특징을 기억하려 했지만 ‘노래와 휘파람을 기차게 불었다’는 것 외엔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참을성만큼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육사 시절엔 물에 들어가 오래 참는 시합에서 늘 일등을 했다고 한다. ‘물태우’의 유래를 여기서 찾는 이들도 있다. 그는 생전 “자꾸 참다 보니 참는 게 제2의 천성이 됐다”고 했다.

▶오래 전부터 “노 대통령이 위중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의 부음(訃音)을 써놓은 게 10년이 훨씬 넘었다는 신문사도 여럿 있다. 말년의 지병은 소뇌 위축증이었다고 한다. 의식은 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딸 노소영씨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어떻게 십여 년을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달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인내 천성으로 10년을 보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생전에 ‘물태우’를 “매우 좋은 별명”이라고 했다. “물 같은 사람이 바람직한 지도자”라고도 했다. 2007년엔 “용수철처럼 일어난 욕구도 가만히 두면 강도가 약해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봤다”고 했다. 그게 물과 같은 리더십일 것이다. 그는 유언으로 ‘나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무겁게 다가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 대통령 조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옹졸한 처사에 ‘물태우’는 뭐라고 했을까. 조용히 인내하고 돌아서 걸어가지 않았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

[선우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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