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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바이든 vs 트럼프’ 대리전 된 美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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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동아일보

26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열린 집권 민주당의 테리 매콜리프 주지사 후보(왼쪽)의 유세장에 등장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웃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매콜리프 후보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의 글렌 영킨 후보 지지 발언을 연일 이어가면서 이번 주지사 선거가 ‘바이든 대 트럼프’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알링턴=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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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이정은 특파원


《19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북부 버크의 주민센터 대강당. 야당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거나 ‘영킨’이라고 쓴 동그란 스티커를 가슴에 붙인 사람들이 모였다. 다음 달 2일 실시되는 주지사 선거에 나선 글렌 영킨 공화당 후보(55)의 지지자였다. 이날 오후 7시 영킨 후보가 연단에 등장하자 강당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이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했다. ‘영킨을 위한 학부모들’ , ‘영킨을 위한 참전용사들’ 같은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대강당 바깥에는 영킨 후보의 경쟁자인 집권 민주당의 테리 매콜리프 후보(64) 지지자 약 20명이 있었다. ‘매콜리프’라고 적힌 파란색 셔츠를 입은 이들은 공화당 소속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닮은 대형 풍선인형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영킨 후보가 ‘트럼프의 허수아비’라는 노골적인 공격 메시지였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주지사 선거를 넘어 미 전역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처음 치러지는 주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여서 선거 결과가 곧 바이든의 국정 운영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다. 내년 11월 중간선거의 향방 또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선거 초반 매콜리프 후보에게 뒤졌던 영킨 후보의 지지율이 최근 가파르게 상승하자 민주당과 백악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사태를 기점으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큰 폭으로 하락한 상황에서 현재 민주당 주지사가 있는 버지니아까지 공화당에 넘겨준다면 국정 장악력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바이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등 민주당의 전·현직 수뇌부가 버지니아로 몰려와 일제히 매콜리프 지원 유세에 나선 배경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 또한 연일 영킨 후보 지지를 호소하고 있어 바이든과 트럼프의 대리전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선거 귀재 vs 억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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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야당 공화당의 글렌 영킨 후보가 19일(현지 시간) 버크의 주민센터 대강당에서 지지층의 환호를 받으며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선거 초반 집권 민주당의 테리 매콜리프 후보에게 뒤졌던 그가 최근 지지율을 바짝 끌어올리면서 막판 대접전이 펼쳐지고 있다. 버크=이정은 특파원 ligh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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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워싱턴과 맞닿아 있는 버지니아는 주 헌법으로 주지사의 연임을 금지하고 중임은 허용한다. 매콜리프 후보는 2014∼2018년 주지사를 지냈고 이번에 다시 도전한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회장,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와 2008년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대선캠프 위원장 등을 맡았던 베테랑 정치인이다. 선거자금 모금의 귀재로 꼽힐 정도로 워싱턴 정계의 문법에 익숙하다.

스스로를 ‘정치적 아웃사이더’라고 부르는 영킨 후보는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를 졸업하고 세계적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4억4000만 달러(약 5100억 원)의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로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경험이 주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소득세 감면, 식료품 판매세 폐지 등 총 18억 달러에 달하는 대대적 세금감면 공약을 내걸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각각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원의원 36년, 부통령 8년을 지낸 후 백악관에 입성한 바이든 대통령 역시 매콜리프 후보와 마찬가지로 기성 정치에 능숙하지만 신선함과 개혁 이미지는 부족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킨 후보는 성공한 기업가지만 타협과 조율이 필요한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3일 주도 리치먼드 유세에서 전화 찬조 연설을 하며 영킨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영킨을 ‘훌륭한 신사’라고 부르며 “버지니아를 탈환할 주역이 될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트럼프의 최측근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고문 또한 영킨을 지지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에 맞서 바이든 대통령 또한 26일 알링턴의 매콜리프 후보의 유세장에 출격했다. 바이든은 “나는 트럼프와 싸웠고 매콜리프는 ‘트럼프의 시종’과 싸우고 있다”며 이번 선거가 자신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리전임을 인정했다. 이곳에 등장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바이든이 연설할 때 “거짓을 멈춰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경비원에 의해 퇴장당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지자 바이든은 잠시 연설을 중단한 채 “이건 트럼프의 유세가 아니다”라고 했다. 앞서 23일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도 리치먼드 유세에 등장해 올해 1월 트럼프 지지자의 의회 폭동, 대선 결과가 사기라는 거짓 선동 등으로 민주주의가 공격받고 있다며 매콜리프 지지를 호소했다.

인구 860만 명의 버지니아의 경우 워싱턴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은 북동부는 민주당 지지, 농촌이 많은 남서부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최근 주요 선거에서는 민주당 지지세가 두드러졌다. 2008년부터 지난해 대선까지 4번의 대선에서 모두 민주당 후보가 이겼고 현 랠프 노덤 주지사도 민주당이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10%포인트 차로 넉넉히 이겼다. 이런 곳에서 민주당이 전·현직 대통령까지 모두 동원하고도 진다면 국정운영 동력이 확 꺾이면서 전국 단위 표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민주당 대 공화당은 상원 100석을 각각 50석씩 나눠 가지고 있다. 하원은 민주(220석)와 공화(212석)의 격차가 불과 8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버지니아를 잃으면 임기 첫해부터 사실상 여소야대 국면을 맞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당연히 그 여파는 내년 11월 중간선거, 2024년 대선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 지지율 하락으로 박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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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판세는 초박빙이다. 8월 초만 해도 매콜리프 후보가 7%포인트 이상 앞섰으나 영킨 후보가 무서운 기세로 따라잡으면서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다. 26일 선거정보 분석업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가 집계한 각종 여론조사 평균은 매콜리프 후보가 46.8%, 영킨 후보가 45.3%였다. 특히 22, 23일 에머슨대 조사에서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49%로 동률이었다.

선거 전문가들은 매콜리프 후보의 지지율 답보가 바이든의 지지율 하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상 최악의 물류대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의 대혼란, 3조 달러의 매머드급 사회복지 예산안을 둘러싼 민주당 내 보수파와 진보파의 분열 등이 겹쳐 민심이 민주당을 떠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킨 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만난 50대 여성 유권자는 “바이든은 최악”이라며 “휘발유 값이 갤런당 5달러까지 치솟는 것 같은 혼란 외에 그가 해준 게 뭐냐”고 분노를 드러냈다. 그의 친구는 ‘매콜리프는 바이든이 미국에 한 것과 똑같이 버지니아에 (실정을) 할 것’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양측이 사활을 걸고 싸우는 만큼 퍼붓는 선거자금 규모도 급증했다. 정치매체 액시오스에 따르면 매콜리프와 영킨은 9월 현재 각각 1260만 달러, 1650만 달러를 모아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역사상 최대 규모를 쓰고 있다. TV와 유튜브에는 이들이 내보내는 광고가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있다.

버크=이정은 특파원 ligh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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