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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태원, 영화와 ‘연애’하며 한국영화 일으켜 세운 ‘미다스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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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

한겨레

24일 한국 영화계의 거목 고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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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세상을 떠났다. 1938년생이니 올해 83살이다. 조문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회사 직원들에게 “이태원 대표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모른다고 한다. 2010년 이후 영화 일을 시작한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모를 수도 있을 터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전 대표는 2004년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 제작을 끝으로 더는 영화 제작을 하지 않았다. 1984년 영화사 설립 이후 불굴의 패기와 뚝심으로 매년 꼬박꼬박 한편 이상 제작한 그로선 제작하지 ‘못했다’가 아니라 ‘하지 않았다’가 더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산업의 지형이 바뀌고 젊은 세대들이 치고 올라오는 세상에서 영화 제작업을 유지하는 것에 미련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16년 전 한 언론사 한 인터뷰에서 ‘영화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는 것이 영화”라면서 “연애야,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새롭지”라고 답했으니 달라진 세상에서 2004년을 끝으로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와 ‘절연’하고 두문불출한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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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류인생> 스틸컷. 태흥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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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풍운아였던 이 전 대표는 그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한국 현대사와 함께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다. 평양에서 출생한 후 남하, 한국전쟁 때 피난 중에 가족과 헤어져 지낸 후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고, 5·16 쿠데타 즈음 조직의 건달로 살다가 건설업에 투신한 후 파산 위기에 처한 영화사를 인수, 84년 태흥영화사를 설립했다.

단 20개의 영화사에 한해 한국 영화를 만들면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게 했던 엄혹한 70년대를 지나 80년대 들어 그의 첫 영화 제작은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였다. 외화 수입 쿼터를 따기 위해 건성으로 한국 영화를 만들던 시대와 결별했던 그만의 돌파구였고 시도였다. 그러나 당시 영화 두편 정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돈을 쏟아 부어 촬영을 진행하던 중 불교계의 반발로 끝내 무산된 곡절을 겪었다. 그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나처럼 심약한 제작자는 혀를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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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 스틸컷. 태흥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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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춘향뎐> 스틸컷. 태흥영화사 제공


1981년 <만다라>를 보고 임 감독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그는 ‘<비구니> 사건’ 이후 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비롯해 11편의 영화를 임 감독과 함께 만들었다. <장군의 아들>로 한국 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서편제>로 한국 영화 사상 첫 100만 관객 기록을 작성한 후 <춘향뎐>으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처음 진출했다. 2000년 칸영화제에서 <춘향뎐>의 첫 공식 상영이 끝난 후 뤼미에르 대극장 안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이 전 대표와 임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서있었던 젊은 나의 눈엔 나이 지긋한 세 남자들이 얼싸안고 우는 모습이 참으로 진기했다. 2년 후 결국 <취화선>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하류인생> 제작 당시 그와 인터뷰한 임범 당시 <한겨레> 기자는 ‘권력과 돈 사이 줄타기를 버티면서 거친 하류를 거슬러 올라온 그의 생존본능과 직관은 한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의 자수성가는 자기 집안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를 일으켜 세웠다’고 썼다. 이 전 대표가 임 감독과 함께한 영화 여정을 돌이켜보면, 한국 영화의 많은 것을 일으켜 세웠고 또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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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군의 아들> 스틸컷. 태흥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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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서울극장에 신입사원으로 막 입사했던 때, 곽정환 당시 서울극장 사장이 우리들에게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한번 보라고 했다. “느리고 밋밋한게 뭔가 좀 그렇다”며 젊은이들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사무실 시사실에서 본 그 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들과는 뭔가 다르게 ‘젊고 아름다웠고 따뜻했다’. 수줍고 내성적인 한 청년의 순애보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려한 카메라에 담겨 끝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학 시절 조조할인 티켓을 끊어 개봉 첫날 달려가 봤던 <어우동> <뽕> <무릎과 무릎 사이> 같이 에로티시즘 강한 영화를 제작한 태흥영화사가 이런 영화도 만들었다니,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 전 대표는 이두용, 이장호 같은 관록의 감독들과 만든 흥행영화뿐만 아니라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비롯해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개그맨> <장미빛 인생> <미지왕> 같은 신인 감독들의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들도 연이어 만들어 주목받았다. 당시 평균 제작비 이상의 돈을 들여 완성도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 배창호, 장선우, 김유진, 이명세, 김홍준, 송능한 감독의 영화들이 그의 직관과 결단으로 탄생했고 80~90년대 한국 영화의 위상을 바꿔놓았다. 자신을 “80~90년대 코리안 미다스 핸드”라고 자칭하며 유머를 구사했던 그였지만, 결코 과장이 아닌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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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스틸컷. 태흥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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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 시장점유율이 불과 15% 언저리를 오갈 때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조직했다. 94년 후배 제작자들을 모아 500만원씩 각출하게 하고 본인이 3000만원을 보태 만든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스크린쿼터 사수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후배들의 추대에 초대 회장직을 맡았던 그는 제작자의 역할과 영향력을 증명하며 젊은 영화인들 편에 섰다. 당시 스크린쿼터 사수 활동에 앞장섰던 정지영 감독은 고인을 회고하며 그가 생전에 한 말을 전해주었다. “정지영, 장선우 같은 이들이 날 왜 좋아하고 존중하겠냐. 다 내가 만든 영화들 때문이지. 다 영화 덕분이지.”

이태원이란 이름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도 그가 만든 36편의 영화는 익히 알거나 들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와 감독은 결국 ‘어떤, 무슨 영화’를 만들었냐로 기억되고 평가된다. “회사에 앉아 있으면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 없어” 매번 촬영 현장에 나가 있었던 그는 10여년간의 두문불출 후 유언도 없이 눈을 감았다. ‘영화란 당신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물을 기회는 영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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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2019년 태흥영화사는 한국영상자료원에 2200여종의 각종 영화 자료를 기증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애사를 담은 구술 기록은 없지만 그가 남긴 영화들의 기록은 보관되어 있으니 다행이다. 까마득한 후배 제작자로서, 탁월한 흥행사이자 동물적 직관의 사업가였으며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했던 영화 제작자 이 전 대표의 명복을 빈다.

심재명/명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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