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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경제직필]문제는 자산불평등이야, 바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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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선을 앞두고 모두가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완화’를 정책기치로 내걸고 있다. 여야의 대선 후보들은 도대체 어떤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완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상위 25%가 순자산의 75%를 점유하고 하위 50%는 겨우 10%의 순자산만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서,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한 달에 현금 몇만원씩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자산불평등과 이로 인한 기회불평등이 해소되리라고 생각하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자산 및 기회불평등의 적극적 시정 없이 시장에 맡겨두거나 약간의 임금조정만 하면 불공정이 개선되리라고 생각하는 후보도 있는 듯하다.

경향신문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취업은 어려워지고 주택가격이 치솟으며 양육비와 교육비 부담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금수저로 태어난 아이들은 막대한 인적·물적 자산을 세습하지만 흙수저 청년들은 희망을 잃고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가계 부채와 불공정 방역으로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과 ‘밑바닥 인생’들은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오늘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공직자들의 꼼수와 부동산투기, LH투기사태와 대장동게이트는 모두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위선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정책담당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세금의 부과는 근로의욕을 저하시킨다고 역설하지만 정작 불공정, 자산격차, 부의 세습 등이 어떻게 근로의욕을 꺾는지, 그리고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배분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출발자산의 불균등한 분포는 사람들의 직업이나 투자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출발자산이 부족한 사람은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출발자산이 풍부한 사람은 타인의 노동을 이용해 자신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투자를 하더라도 자산이 많은 사람의 투자수익률이 더 높다. 그래서 일찍이 마르크스는 생산적 자본의 불균등한 분포를 자본주의적 착취의 원천으로 지목한 바 있다.

날이 갈수록 자산격차는 벌어지는데 애꿎은 종부세는 동네북이다. ‘개혁진보’세력이라는 집권당은 종부세의 과세기준선을 9억원에서 11억원으로 상향하는 종부세법 개정안을 기어이 발의하고 가결시켰다. 야당의 어떤 대선 후보는 종부세를 아예 없애고 양도세를 면제하겠다고 한다. 올해 상속증여세 세수가 10조원을 넘었다. 이 또한 우리 사회의 자산 불평등과 부의 세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상속세를 되레 감세하자는 논의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 유족들의 상속세가 1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부 국회의원들과 언론은 상속재산의 절반을 국가가 가져간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한다.

유산총액에서 과세대상이 아닌 부분(문화재, 공익법인 출연금, 채무 등)을 차감하고 나서 다시 다양한 공제를 뺀 과세표준에 대해 세율을 적용하고 거기에 다시 세액공제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상속세의 실효세율은 낮다. 2020년 국세통계포탈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피상속인은 총 1만1521명인데 그중 상속액이 50억원 이하인 1만751명(전체의 93.3%)의 실효세율은 3.4~16%에 불과하다. 상속액이 50억원 이상인 770명(전체의 6.7%)이 전체 상속재산액(27조 4,139억원)의 43%를 차지하는데 이들의 실효세율은 22~40.5%이다. 상속재산의 40.5%를 상속세로 내는 사람들은 21명의 수천억원대의 자산가들뿐이다.

최근 상속세 과세방식을 유산세 방식에서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바꾸자는 논의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유산세 방식은 피상속인(증여자)의 유산총액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방식인 반면 유산취득세 방식은 상속인(수증자)의 유산취득가액을 기준으로 상속인별로 과세하는 방식이다. 상속세는 비례세가 아니라 누진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율 조정 없이 과세방식만 전환하면 세수와 재분배 효과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활동하였던 재정개혁특위에서도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전환할 때는 반드시 세율인상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청와대 정책실은 한국 사회에서는 자산불평등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착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책의 최우선과제도 ‘소득’분배 개선이었다.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많은 청년들을 졸지에 벼락거지로 만들어버린 것도, 준비 없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결국 최저 임금인상을 ‘을들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잘못된 정책 판단이 불러온 참사였다. 현재의 여야 대선 후보들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려는가? 문제는 자산불평등인데 분배와 공정에 관한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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