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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 내건 군인 대통령, 수감·사면·투병까지 영욕의 86년 [노태우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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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마지막 군인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시작된 군인 대통령 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다. 군사 정부에서 민간 정부로, 산업화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 시대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 임기는 5년이었지만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기였다”고 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6·29 선언, 북방외교, 남북대화는 민주화 시대에서 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12·12 쿠데타, 거액의 비자금 은닉 등 그림자가 너무 커 그의 공은 과에 묻혀버렸다. ‘위대한 보통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본인의 희망과 달리 국민들은 그를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의 주역으로 여긴다. 퇴임 후 이뤄진 역사적 단죄는 그의 시대적 위치와 한계를 보여준다. 스스로 6·29로 민주화를 이끌었다고 주장했지만 국민 상당수는 그를 ‘전 대통령’으로 부르기조차 거부하는 것도 현실이다. 생의 말년인 2013년 9월에야 그는 추징금 2628억9600만원을 완납했다. 16년만의 지각 납부였다.

■대구 소년, 육사 정규 1기생 그리고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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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6일 지병 악화로 사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 팔공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만 5세 때 부친이 요절하면서 남동생과 함께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공산 국민학교를 졸업한 1945년 광복을 맞았다. 대구공립공업학교(현 대구공고) 전기과에 입학해 3학년을 다닌 후 경북중학교에 편입했다. 친구이자 쿠데타를 함께 모의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는 그보다 한살 위였지만 대구공립공업학교에는 두 학년 아래로 입학했다.

1951년 4년제 정규과정으로 재개교한 육군사관학교 정규과정 1기생으로 들어갔다. 육사에서 전두환, 김복동, 박병하, 박갑용, 남중수 등의 친구들을 만났고, ‘하나회’의 모태가 된 ‘오성(伍星) 그룹’을 결성했다. 이 시절 김복동의 여동생 김옥숙을 만나 59년 결혼했다. 결혼식 사회자는 전두환 대위였다.

1981년 대장으로 군을 떠나기까지 30년 동안 그는 군인 정치 시대의 현장에 있었다. 서울대학교 ROTC 교관으로 있던 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사 졸업생들을 모아 ‘혁명’ 지지를 선언했다. 1978년 1월 전두환의 후임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9사단장으로 있던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이 터졌다. 그는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군대를 동원했고, 김재규와 연루돼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했다. 역사를 바꾼 12·12 사태였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노태우가 주역이 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12·12 이후엔 본격적인 정치무대로 나섰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보안사령관을 물려받아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다. 1981년 여름엔 “정부에 들어와 도와달라”는 전두환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민간인으로서 첫 직책은 5공화국 외교안보 담당 제2 정무장관이었고, 이후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냈다.

■6·29 선언 그리고 마지막 군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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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선후보이던 1987년 10월 부인 김옥숙씨와 함께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국민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 전 대통령은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 대표위원에 취임하면서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1987년 6·10 민주항쟁이 터지고 직선제를 향한 국민의 열망이 끓어오르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첫 번째 조항으로 하는 특별선언을 6월29일 발표한다. 역사적인 6·29 선언이다.

상황에 밀려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자발적 결단’이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의 대세 속에서 어떻게 안보와 성장을 유지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나는 민주화의 대세를 맨 앞에서 주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것이 6·29 선언 정신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의 일관된 국정철학이었다.”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그는 의외의 승리를 거둔다. 민주화 열망은 컸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계가 분열하면서 ‘1노3김’의 구도가 형성된 게 원인이었다. 그는 ‘위대한 보통사람’을 간판으로 내걸고 야당의 군정종식론에 “군정을 종식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이 필요하다”는 징검다리론으로 맞섰다. 결국 유효투표의 36.6%인 828만2738표를 얻어 제13대 대통령이 됐다. 투표 결과에 대해 일부에선 여전히 조작의혹이 제기된다.

1988년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면서 그는 취임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평민·민주·공화당으로 구성된 야 3당은 5공특위와 광주특위를 꾸려 5공청산을 밀어붙였고, 5공 청문회가 정국을 달궜다. 이 때 내놓은 탈출 카드가 3당 합당이었다. 그는 90년 2월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공화당 김종필 총재를 규합해 216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야합’비판에 그는 “3당 합당의 보수 대연합 정신이 한국 정치판의 가장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질서였다”고 말했다.

북방정책과 남북대화의 시작도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다. 군사정권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이 부분은 업적으로 평가한다. 1988년 공산권 국가 중 처음으로 헝가리와 수교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릴레이 회담 끝에 1991년 12월13일 남북 총리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1992년 1월20일엔 남북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퇴임, 감옥행 그리고 쓸쓸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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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인 1995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재판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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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25일 퇴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퇴임 후는 비참했다. 최초의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대적인 5·6공 청산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그는 비자금 은닉과 12·12 쿠데타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면서 전두환과 함께 감옥에 가는 전직 대통령이 됐다. 그는 훗날 “산모를 부정한 김영삼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1995년 10월9일 당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거액의 비자금 은닉이 밝혀졌다. 검찰은 11월1일 4100억원의 비자금을 밝혀내고 그를 서울 구치소에 수감했다.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진상규명 목소리도 커졌다. 그는 그 해 “광주사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내 발언을 용서해달라”고 사과했다.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검찰은 그해 12월3일 전두환과 노 전 대통령 등 신군부의 핵심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로 구속 기소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그는 17년 형이 확정됐다. 그에게는 추징금 2628억9600만원도 부과됐다. 2년여 간의 수감생활 후 그해 12월22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대기업의 정치자금 제공을 관행으로 표현하면서 “나는 이 일로 모든 것을 잃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퇴임 후에도 막대한 자금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대선 후 예상외로 많은 자금이 남았고 김 전 대통령이 당선 후 청와대를 찾지 않아 전해주지 못한 채 퇴임했다”고 해명했다.

사면 후엔 은둔생활을 했다. 다만 검찰에서 받은 ‘추징금 굴레’는 족쇄가 됐다. 검찰 수사에서 비자금이 대부분 드러나면서 91%에 달하는 2397억원을 추징당했지만 미납이 230억원에 달했다. 그는 추징금을 내겠다며 동생 재우씨와 옛 사돈인 신동방그룹 신명수 전 회장에게 맡겨놓은 비자금을 돌려달라고 진정과 소송을 내는 등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재우씨와 신 전 회장이 2013년 9월 각각 추징금 150억원과 80억원을 대납하면서 16년 만에 추징금을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 연희동 사저의 문동휘 비서관은 완납 직후 “국민께 내세울 건 아니지만, 1만분의 1이라도 할 도리는 했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서 “공치사를 할 건 못 되지만, 여생을 불명예와 오점을 안고 살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 들면서 그는 휘귀병인 소뇌 위축증을 앓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았고, 2015년 12월에는 천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았다. 올해 4월에도 호흡곤란을 겪으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당시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호흡보조장치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라면서 “지상에서 아버지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지병이 악화하면서 86세를 일기로 26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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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유정인 기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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