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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친구에서 후계자까지…‘2인자’ 노태우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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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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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탓에 대외 활동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이어간 지 10여년 만이다. 향년 89. 노태우씨는 전두환씨와 함께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여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했고 전씨의 후계자로서 대통령까지 올랐다.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시절 ‘6·29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긍정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민중학살의 주범이기도 하다. 퇴임 뒤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도 박탈되는 등 말로는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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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육군사관학교 재학 당시 오성회 동료들과 기념촬영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아래 왼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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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잇는 ‘2인자’로 승승장구


노태우씨는 1932년 12월4일 팔공산 근처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통사고로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노씨는 숙부(노병상)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해 그곳에서 동기인 전두환, 정호용을 만났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이어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서울에 인접한 고양에 위치한 육군 9사단장이던 그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체포하고, 무단으로 군을 서울로 진입시키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이튿날 9사단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노씨는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씨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노씨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이어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되는 등 5공화국의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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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후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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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뒤 대통령 당선…‘북방외교’ 성과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씨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씨는 신군부 세력 ‘2인자’의 이미지를 씻고, 전씨와 차별화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전두환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씨는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였다.

그러나 노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인 1988년 치러진 4·26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다. 전두환씨는 당시 국회에 나와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씨는 1989년 12월31일 전씨의 국회 답변을 끝으로 ‘5공 청산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1990년 1월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이끌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다.

노씨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튼 뒤,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구권과 수교를 넓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런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구권의 몰락, 미국의 세계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평이다. 노씨는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한 비밀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씨는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1989년부터 실시됐다. 그러나 노씨가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씨는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씨는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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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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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뒤 비자금, 군사반란 혐의로 단죄…오랜 투병 끝 사망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노씨는 퇴임 2년8개월 만인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은행 잔고조회표를 흔들면서 촉발한 ‘노태우 비자금’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 때 300억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고, 노씨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실토하면서 노씨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빗발쳤다. 파장이 커지자 노씨는 그해 10월27일 “재임 중 약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씨를 소환조사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씨는 그해 11월16일 뇌물수수 혐의로 헌정사상 처음 구속되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이어 12월3일엔 전두환씨가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른 신군부 세력 단죄였다. 대법원은 뇌물 수수, 군사반란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노씨에게 1997년 4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를 두달 남겨둔 그해 12월22일 “국민 대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며 노씨와 전씨를 특별사면했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씨와 전씨 사면에 동의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3월 참여정부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 176명의 서훈과 훈장을 모두 박탈했는데, 노씨는 이때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각종 서훈을 박탈당했다.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을 끝마친 노씨는 천식 등 지병이 악화돼 최근까지 10년 이상 대외 노출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했다. 2011년에는 기관지에서 한방 침이 발견되기도 했고, 올해 4월9일에는 호흡곤란을 겪어 119구급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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