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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보통 사람의 시대’ 내걸고… 직선제 부활·북방외교 이끈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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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압 책임론은 평생의 멍에로

26일 별세한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1979년 친구이자 전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역사의 소용돌이에 들어섰다. 전두환 신(新)군부와 5공(共) 정권 내내 이인자의 삶을 보낸 끝에 1987년 부활한 직선제 대선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6·10 항쟁으로 분출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유혈 충돌없이 민간 정권으로 이양을 이끌어냈고 5공 청문회 등을 열어 전두환 정권과 단절도 시도했다. 재임 중 소련 해체기를 맞아 북방 외교를 펼쳐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반면 퇴임 후 12·12 군사반란과 수천억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처벌받았다. 전 전 대통령과 함께 그에게 제기된 5·18 진압 책임론은 평생의 멍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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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2021.10.26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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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팔공산 근처인 경북 달성 신용리(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사(陸士) 11기로 군문(軍門)에 들어섰다. 육사에서 필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동기생으로 만났다. 전 전 대통령과 정호용·김복동 같은 동기생들과 함께 친목 모임으로 만든 ‘5성회’가 1963년 하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1959년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했다.

고인은 육사 졸업 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방첩부대 방첩과장과 육군본부 정보과장 등 ‘정치 장교’의 길을 걸었다. 월남전 참전 후에는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거쳐 1978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때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육군 대위였던 5·16 때 전두환 등 장교들과 ‘군사혁명 지지 행진’에 참가했다.

고인은 1979년 12·12 당시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키는 등 군사 반란에 가담했다. 이듬해 전두환 신군부의 5·17 계엄 확대 등에도 관여했다. 1979년 10·26 직후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신군부가 모여 있던 30경비단을 포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면서도 “그러나 30경비단에 들어온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우리는 ‘기회는 이때’라고 판단해 군을 출동시키기로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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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와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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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共) 정권 출범 후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고인은 곧바로 전 전 대통령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군 경력과 정치 활동의 대부분을 전두환에 이은 이인자로 보냈다. 전 전 대통령 재임 7년을 이인자로 버틴 그는 1987년 민정당 대표위원으로서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격 수용한 6·29 선언을 했다.

고인은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걸고 당선됐다. 박정희의 유신(維新) 선포 이후 15년 만의 첫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3김(金)의 할거와 양김(兩金)의 분열 덕도 있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YS)·김대중(DJ) 두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해 독자 출마하면서 36.64%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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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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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집권 후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면서 정국 불안정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고 218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소외시켜 “지역구도를 심화한 야합”이란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 내각을 출범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정치적 은인인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에도 동의해줬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윤환 의원에게 대야(對野) 협상 전권을 주며 “나의 신념은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자)’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면적 5공 청산과는 거리가 있었다. 자신의 후임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후 전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987년 대선에 민정당 후보로 나선 고인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했다. 6·29를 전두환이 기획했느냐, 노태우가 주도했느냐를 두고 양측의 말이 다르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 요구를 큰 유혈 희생 없이 제도적으로 수용해낸 점은 노 전 대통령의 공(功)으로 평가하는 학자가 적지 않다. ‘전두환의 후계자’란 멍에가 평생을 따라다녔지만 군사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유혈 충돌없이 관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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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 관계의 일반 원칙에 관한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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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재임하던 시기는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 공산권 사회가 해체되던 격변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북방외교를 벌여 성과를 냈다. 기존의 틀을 깨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됐고 그것을 실행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그 시기에 이뤄졌다. 북의 핵개발로 빛이 바랬지만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남북 단일 체육팀 출전 등 남북 대화가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었다.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후 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수교해 나갔다. 성공리에 끝난 88 서울올림픽은 남북 체제 경쟁이 한국의 승리로 끝났음을 알리는 축제였다.

그의 재임기에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됐다. 노동계 파업, 재야와 학원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교내 시위 중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 일변도 정책 추진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농어촌부채 탕감, 토지공개념 도입, 대기업 비업무용 토지 매각, 주택 200만호 건설 등 복지와 형평 우선주의 기조도 도입했다. 인천공항, KTX 등 대형 국책사업도 시작했다. 경제 성장률은 8.5%로 떨어지고 물가상승률이 7.4%로 급상승했지만 경상수지는 연평균 7억6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 지표는 괜찮았다.

민정당 대선후보였던 고인은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했다. 그는 재임 중 ‘물태우’라 불리며 반대파로부터 조롱을 받았지만 역으로 이런 그의 정치적 캐릭터는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유혈 충돌없이 넘긴 그의 공이란 평가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인터뷰에서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다. 물 대통령이란 별명 잘 지어주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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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20주기에 참석한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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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 대통령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 참여와 5·18 유혈 진압 책임론, 수천억 비자금 조성은 그에게 멍에가 됐다. 결국 퇴임 후 자신도 전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서는 운명을 맞았다. 비자금 2628억원 조성,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 혐의 등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고인은 지난 2013년 동생과 재산반환 소송을 벌이면서까지 추징금 2628억원을 다 냈다. 추징금을 완납하면서는 “1만분의 1의 도리를 했다”고 했다. 아들 재헌씨는 재작년 두 차례 광주를 찾아 5·18 민주묘지에 참배하고 희생자 가족들과도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광주 방문을 희망했으나 투병으로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서 ‘5·18의 진범은 유언비어’라고 했지만 회고록 수정의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광주를 찾았던 재헌씨는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하다”고 했다. 또 “그만 하라고 하실 때까지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고, 천식 등으로 종종 병원 치료를 받았다. 2019년 10월에는 서울대병원에 나흘간 입원했다가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휠체어에 탄 채 퇴원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최경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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