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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박혜정의 시대, 윤석열의 '정치'[50雜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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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미디어전략본부장] [편집자주] [김준형의 50잡스]50대가 늘어놓는 雜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 여전히 나도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소소한 다이어리입니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80년대 전두환정권시절 대학가에선 죽음이 일상이었다. 용기없는 회색인의 삶을 살던 보통 학생들을 유독 아프고 부끄럽게 만들었던 죽음중의 하나는 86년 5월23일 서울대 국문과 4학년 박혜정 학생의 한강 투신이었다.

그의 유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한강에 투신하기 이틀전 그는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당시 농대 3학년이던 이동수 학생이 분신투신하는 걸 목격했다. 그 한달 전 쯤엔 전방입소(대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1주일간의 최전방 경계근무 안보교육을 받도록 했던 제도) 반대시위에서 미생물학과 4학년 김세진, 정치학과 4학년 이재호학생이 분신했고, 다음달인 5월 모두 세상을 등졌다. 학생 시위에 잠시 몸담았다가 소시민적 갈등속에 문학도의 길을 걷고자 도서관에 앉아 있던 박혜정은 "5월은 회색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운 달"이라며 괴로워했다. 어디 5월 뿐이었을까. 5공의 모든 달은 회색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나날이었다. 최인훈 소설 '회색인'들의 트라우마가 6.25였다면 5공 그 시절 회색인들에게는 5.18이었다.

훗날 후배들은 서울대 인문대 자리에 세운 추모비에 '박혜정 열사'가 아닌 '박혜정 학형'이라고 적었다. 동료 학생들에게 '학형' 박혜정의 죽음은 5월은, 그 시대의 고통이 '열사'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아픔과 부끄러움이었다. 도서관에서 친구 선후배의 투신을 내려다 봤건, 전투경찰의 군화발 소리를 들으며 강의실을 지켰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평균적인 인식이었으리라. 군부독재에 치를 떨었던 이같은 평균적 인식들이 훗날 우리 사회 민주주의 진지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믿는다. 어쩌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된 것도 아니고 전두환이 정치를 잘해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의 시대가 온건 더더욱 아니다.

윤석열 전검찰총장도 신림동 고시원, 혹은 법대 도서관에서 4년 후배 박혜정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지 않느냐"라는 말은 그 시대 박혜정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지나, 아무리 회색의 색소조차 흔적이 희미해졌다 해도 말이다.

감금 고문전문가, 살인전문가를 고용하고, 축재와 뇌물전문가, 부정부패 전문가를 활용해 나라를 죽음의 침묵으로 만들어 버린 그 시대에, '잘했던 정치'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릿 속에는 단 한가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보수 야당의 지역적 기반에 가서 전두환을 칭송하고, '(심지어)호남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이야기하는건,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역 이념 장사다. 심지어 영남 유권자의 역사인식조차 모독하는 것이다. 익명의 온라인 공간과 극우 언론 매체에선 "윤석열이 틀린 말 한거 없다"라는 글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건, 내부 경선을 앞둔 그의 집토끼 사냥이 성공적이라는 반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의 점수를 딴 그가 이번에는 호남민심을 달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하겠다고 한다. 국민의 힘 최종 경선일 직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분노한 시민들에게 달걀이라도 맞는 '정원식 신화'의 재현이라도 꿈꾸는가.

전두환의 소울메이트 노태우 정권 초,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정원식은 전두환 정권시절 추진했던 학원안정법을 본뜬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추진하는등 강경책을 쓴 공으로 1991년5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대학가의 대규모 시위와 연쇄 분신사태로 정국이 급속히 얼어붙던 시절이었다. 총리 임명 직전,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됐는데도 외국어대학교에 마지막 강의를 하러 갔다가 달걀과 페인트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거의 전 언론이 운동권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부쳤다. 이어 훗날 정권과 검찰의 조작으로 밝혀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담당검사 중의 한명이 곽상도 국민의 힘 의원이다)까지 겹치면서 조성된 공안정국으로 정권은 위기를 넘긴다. 이어 민주자유당은 1991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런게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잘했던 정치'라고 혹여라도 생각할까 무섭다.

전두환을 옹호한 게 왜 광주와 호남에 와서 사과할 일인가. 5.18과 5공의 피해자는 보수도 진보도, 호남 영남도 아닌 온 국민이다.

개에게 사과를 건네는 반복된 그의 '진심'에 개가 된 건 전 국민이지 광주 호남 사람만이 아니다. 12.12쿠데타, 5.18학살, 삼청교육대, 고문살인, 간첩조작, 강제철거, 정치자금, 기업강탈...이런 5공 시대를 온 국민들이 살아냈다. 그 덕에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자들이 부끄럽게 죽어야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죽을 만큼 아팠던 그 시대를 똑바로 기억하고 위로하고 치유해야 하는 건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미디어전략본부장 미디어전략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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