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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독립운동, 돈 받으려 한 일 아냐” 안중근家 자긍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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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중근 의사 의거 112주년… 사흘전 조카며느리 박태정씨 별세

남편 사별 후 어렵게 살며 독립운동 헌신한 가족들 삶 증언

조선일보

2017년 서울 연세대 안중근 사료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 박태정씨(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07년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로 망명하기 전에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안중근 의사, 그 왼쪽이 동생 안정근이다. /연합뉴스·역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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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 의사의 조카며느리인 박태정(91)씨가 안 의사 의거 112주년(26일)을 사흘 앞둔 지난 23일 별세했다. 발인은 25일 서울 이대서울병원에서 엄수됐고, 시신은 용인공원묘원에 묻혔다. 박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1884~1949)의 며느리이자 안 의사의 조카 안진생(1916~1988)의 아내다.

유복한 집에서 자란 박씨는 24세 때인 1954년 서울대 사학과를 중퇴하고 14세 연상인 안진생과 결혼했다. 안중근 의사의 유가족 상당수가 해외로 흩어진 상황에서, 국내에 남은 가장 가까운 유가족이자 그들의 간난신고를 증언한 인물이 박태정씨였다. 2004년 주간조선 인터뷰, 2014년 MBC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안중근 의거 후 안정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등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망명했고, 이후 ‘이삿짐을 50번이나 쌌다’고 할 정도로 만주와 중국, 러시아를 오가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가 러시아에 안정근의 체포를 요청하자 러시아군에 입대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안정근의 아내이자 안중근 의사의 제수인 이정서 여사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는데, 안 의사가 국권 회복을 맹세하며 자른 손가락을 늘 허리에 매고 지냈다고 한다.

안정근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을 지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아군이 3일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참상을 임정에 전했다. 안정근의 차남 안진생은 “옷이 누더기가 되고 얼굴에 고드름이 달린 독립군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안정근은 1925~1937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에 머물며 본국에 상륙할 공작용 선박을 만들다 일제에 정보가 누출돼 실패했고,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홍콩으로 피란 간 뒤 한때 베트남에서 살기도 했다. 광복 후 한국구제총회장을 맡아 재중 동포들의 고국 귀환을 지원하다 1949년 상하이에서 별세했다.

안정근은 아들 안진생을 선박 전문가로 키우기 위해 1938년 이탈리아로 보내 조선공학을 공부하게 했다. 안진생은 1945년 제노아 공대에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생활을 거쳐 1953년 귀국해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1962년부터 이탈리아 참사관과 콜롬비아 대사 등 18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진생을 “숨어있는 애국자”라 부르며 추석 때마다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안진생은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중 강제 해직된 뒤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아버지께서 후손들 연금 받으라고 독립운동을 하신 게 아니다”라며 서훈 신청을 미뤄 아버지 안정근은 1987년이 돼서야 독립장 서훈을 받았고, 안진생이 1988년 별세할 때까지 꼭 1년만 보훈연금이 나왔다. 1945년 이후 사망한 독립유공자는 직계 자녀에게만 연금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 뒤 안진생의 아내 박태정씨는 여의도 아파트를 팔고 창동의 월세 아파트, 신월동의 임대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기초노령연금과 기초수급비를 제외하면 박씨가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없었다. 두 딸과 외손녀로 이뤄진 4인 가족은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결혼반지도 팔고 카드 빚을 졌으며, 카드 빚을 청산하고 나선 아파트 보증금 마련을 위해 다시 은행 빚을 졌다고 한다. 지난 3월엔 큰딸 안기수(66)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외손녀 우성화씨는 “할머니께서 올 7월 폐렴을 변비로 오진 받아 제때 치료를 못하셨고, 다시 입원했을 때는 이미 패혈증 쇼크까지 진행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박씨는 생전 독립운동 집안의 며느리, 외교관의 아내로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우성화씨는 “어려워지셨을 때도 남에게 베풀고 살려고 애쓰셨고, 할아버지(안진생)께서 공직에 계실 때 청렴하게 사신 걸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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