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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2] ‘쇼통’ 국왕,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르고 2월혁명으로 쫓겨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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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마지막 왕 ‘우산왕’ 루이 필리프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졌다.<본지 10월 12일 자 A34면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편 참조> 이제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어찌 될 것이며, 권력은 누가 쥘 것인가? 길거리에서 피 흘리며 싸운 민초들의 바람과는 달리 권력은 엘리트가 탈취해 가져갔다.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는 귀족들과 성장해 가는 부르주아들은 공포정치의 추억이 서린 공화정보다 계몽된 자유주의 왕정을 선호했다. 이런 일을 맡기기에 딱 맞아 보이는 인물이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였다.

머리는 왕당파, 엉덩이는 공화파

오를레앙 가문은 프랑스 왕실 부르봉 가문의 방계다. 루이 13세의 차남, 다시 말해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후손으로서, 왕권 승계 문제가 생기면 촌수를 따져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는 집안이지만, 실제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터지자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는 왕족이면서도 혁명에 적극 동참하여 이름도 스스로 에갈리테(Egalité·'평등’)로 바꿨고, 심지어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쿠데타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받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아들 루이 필리프는 스위스⋅영국⋅시칠리아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 복고 시기에 귀국했고, 자기 가문의 지위와 재산도 되찾았다. 그렇지만 왕권을 차지한 부르봉 왕실과는 거리를 두고 겸손한 자세로 잘 처신하고 있었다. 7월 혁명 후에 부르주아와 자유주의 귀족들이 보기에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계획에 어울리는 인사였다. 혁명의 대의를 어느 정도 계승하면서도 혁명의 공포를 막아줄 중립적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다만 공화정을 바라고 혁명을 일으킨 군중이 과연 그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인물이 라파예트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대혁명에 모두 참여해서 ‘두 세계(구대륙과 신대륙)의 영웅’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리던 혁명의 베테랑 라파예트가 루이 필리프가 권력을 잡는 데 보증인 역할을 했다. 민중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루이 필리프에게 들려주고 파리 시청 발코니로 데리고 나와 포옹했고, 이를 지켜본 군중이 모두 환호했다. 이 한 번의 쇼로 사실상 모든 게 결정되었다. 이후 그는 의회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랑스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샤토브리앙 같은 전통주의자가 볼 때에는 ‘길거리 권력’과 전통적 국왕 권위를 합친 이 체제는 ‘잡종 사생아’였다. 코미디 같은 퍼포먼스를 통해 권력을 잡아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혁명과 보수 사이에 중립을 지킨다는 태도도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편저편 없이 ‘정중앙(juste-milieu)’의 정책을 편다고 하지만, 머리는 왕당파, 엉덩이는 공화파라고 놀림을 받았다.

7월 왕정은 결코 중립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명사층(notables), 다시 말해 토지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연합 계층이 지배하되, 갈수록 부르주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왕 자신은 토지 귀족 신분이면서 돈 많은 부르주아를 대변했지만 겉으로만 민중을 위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는 대신 허위의 치장에 몰두했다. ‘시민왕’은 실제로 시민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그러한 ‘인상’을 주는 데 골몰했다. 소박한 마차를 타고 순시하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고, 파리 혹은 공식 방문한 지방 도시들의 시청 발코니에 나와서 군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부르주아 의상을 입고 우산을 든 채 혼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상점 앞에서 진열된 상품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에게 중요한 소품은 우산이었다. 늘 우산을 들고 있어서 그는 ‘페팽(M. Pépin·’우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데 우산 없는 한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국왕은 우산을 함께 쓰고 공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So sweet~! 얼마나 부드러운 지도자인가! 루이 14세가 태양왕이라면 그는 우산 왕으로 통했다.

‘두 세계의 영웅’ 라파예트가 보증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에 자신의 애민 정신을 더욱 멋있게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에는 비를 피하는 게 아니라 늠름하게 비를 맞는 게 핵심이다. 1831년 6월 12일, 국왕이 메스(Metz)에서 열병식을 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부가 망토를 건네주려 하자 국왕은 도로 가져가라는 손짓을 했다. 병사들이 망토를 입고 있지 않았으니, 국왕이 홀로 비를 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비에게 쓴 편지에서 루이 필리프는 그때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총명한 국민이 내 생각을 번개같이 알아채고는 ‘브라보!’ ‘국왕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소. 이 일화는 순방 여정 내내 각지로 퍼져 나갔소.”

함께 비를 맞겠다는 표시는 특권의 종식과 평등을 상징했다. 국왕은 얼마 후 브장송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이 왕을 위해 비를 맞고 있다면 왕 또한 망토를 내던지고 그들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비는 국민의 정서를 끌어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루이 필리프는 망토를 내던지고 군중과 함께 비를 맞았다. 브장송⋅캉⋅툴루즈⋅낭시⋅스트라스부르⋅루앙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1833년 바이외에서는 한 여성이 왕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주려 했고 어떤 남성은 마차에 머무를 것을 권유했다. 국왕은 단호하게 답했다. “당신들과 함께하겠소.” 그러자 “만세 소리와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고 신문 기사는 전한다. 이제 날씨가 화창해서 비를 맞지 않는 날이면 그는 불행했다. 이후 통치자가 국민과 함께 비를 맞는 일은 프랑스의 전통이 되었다. 비가 자주 오는 가을날, 예컨대 1차대전 승전 기념일인 11월 11일 행사에서 프랑스 대통령들은 흔히 루이 필리프처럼 비를 맞곤 했다. 특히 드골 대통령이 군모를 쓰고 의연하게 비를 맞는 모습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통치자가 국민과 비 맞는 게 전통으로

비를 맞던 바람을 맞던 ‘쇼통’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1840년대에 심각한 경제 재정 위기가 터졌다. 밀과 감자 흉작으로 식량 위기가 발생한 데다가, 산업계의 불황과 임금 투쟁, 신용 위기가 겹쳤다. 이런 마당에 정부가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문과 창을 조사하자(당시 대문과 창문의 개수는 과세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주민들이 거칠게 저항했다. 민중의 투표권 확대 운동에 대해서는 노동과 검약에 의해 부자가 되면 투표할 수 있다고 시니컬하게 비난하면서, 정작 정권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했고, 독직과 횡령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선거 때 유권자들에 대한 매표 행위도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루이 필리프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과 저항이 거세졌다. 국왕 암살 시도도 수차례 있었는데, 그중 대포알 20발을 묶어 거리에서 터뜨린 1835년 사건 당시에는 19명이 사망했고, 국왕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사람들은 국왕을 대놓고 비판했다. 이제 우산은 왕에 대한 비판에 동원되었다. 왕을 비난하고 싶으면 우산에 대고 욕하면 된다. 184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부르주아의 이해만 지키려 하는 백만장자 국왕은 왕도 아니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다시 혁명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감을 못 잡고 지나갔지만 일부 인사는 거대한 격변을 예감했다. 토크빌은 “우리는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고 말했다. 1848년, 막상 혁명이 터지자 그토록 빠르고 광범위하게 격변이 일어난 데 대해 사람들은 경악했다. 우산으로 마그마를 막을 수야 없지 않은가.

[혁명과 비]

바스티유 함락 1주년 축제

시민들 쏟아지는 폭우에도 함께 춤추면서 결속 다져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연맹 축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 인파가 운집하여 시민들의 단합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하필 이런 날에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하늘도 혁명에 반대한다는 징조라며 ‘대홍수’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무질서 속에 떠밀리는 인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의 윤곽이 드러난 여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신나게 묘사했다. 운집한 시민들과 병사들은 참담한 상태로 나쁜 날씨를 원망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돌연 분위기가 바뀌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병사들과 시민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수만 명이 취우(驟雨) 속에 열광적으로 춤을 추는 행위는 악천후가 혁명의 열정을 누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오후 늦게 드디어 해가 났을 때,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날 일은 앞으로 두고두고 반복될 정치 현상을 예고했다. 함께 비에 젖음으로써 굳게 결속을 다진다는 특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중은 감성의 공동체 속에 하나가 되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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