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6·25 때 전우 살리려 몸으로 수류탄 막은 美 해병대원 별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계일보

미국 해병대원 시절의 듀언 듀이. 미 해병대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내와 딸이 좋은 새 남편, 그리고 새 아빠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6·25전쟁 당시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 전우들을 살리고자 그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덮었던 미국 해병대원이 훗날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온몸으로 수류탄을 막고서도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듀언 듀이의 얘기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이기도 한 듀이가 89세를 일기로 타계하며 미 해병대는 추모 물결에 휩싸였다.

25일 미 언론에 따르면 1932년생인 듀이는 지난 11일 플로리다주(州)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듀이는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간 6·25전쟁 참전용사 가운데 생존해 있는 명예훈장 수훈자가 4명이었는데 듀이의 타계로 이제 3명으로 줄었다고 미 언론은 보도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듀이는 미 해병대의 일원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하루는 왼쪽 발뒤꿈치 쪽에서 터진 수류탄에 다쳐 부대 의무대로 복귀한 뒤 치료를 받았다. 아직 치료가 다 끝나기도 전에 적이 던진 또 다른 수류탄이 막사로 굴러 들어왔다. 처음에는 ‘저 수류탄을 안전한 곳으로 던져 버릴까’ 했던 듀이는 자신의 몸 상태를 감안하면 멀리 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변에 “엎드려” 하고 경고 신호를 보낸 뒤 그냥 자기 몸으로 수류탄을 덮었다. 당시 듀이의 나이 불과 20세였다.

기적처럼 듀이는 죽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크게 다친 그는 곧장 야전병원으로 이송됐다. 의료진이 수술을 하던 중 듀이의 복부에서 총알을 찾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느라 자신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세계일보

1953년 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듀언 듀이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미 해병대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군이 부상병에게 주는 ‘퍼플하트’ 훈장을 받은 듀이는 군 병원에 입원해 4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비로소 회복했다. 당시 미국에는 듀이의 아내와 딸이 오매불망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딸은 듀이가 임신한 아내를 남겨두고 6·25전쟁 참전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 뒤 태어난 아이라서 듀이 또한 그 얼굴이 꼭 보고 싶었다.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10월 듀이는 귀국했다. 그리고 곧 전역했다. 이듬해인 1953년 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직접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본인이 미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한 직업군인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숱한 전투를 지휘한 끝에 나치 독일을 굴복시킨 전쟁영웅이다. 전투 현장을 너무나 잘 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만약 수류탄이 우리 중 한 명에게 떨어졌다면 몸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라며 듀이에게 “자네는 강철같은 몸을 가진 게 틀림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듀이는 평생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2011년 열린 참전군인 관련 어느 행사에서 그는 “다른 군인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가 명예훈장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며 칭송을 아까지 않으면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을 생각한다”고 화답하곤 했다. 전쟁에서 너무 일찍 목숨을 잃는 바람에 용기를 발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수많은 전우들을 기린 것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