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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태평로] 30년 전 수서 비리도 정권 무너진 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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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안 밝힌 수서 ‘몸통’ 권력 무너진 4년 후 드러나

비리 권력은 국민 팔아 생존… 깨어있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조선일보

경기도 성남시 판교대장 도시개발구역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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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최대 부동산 개발 스캔들인 수서 사건과 지금의 대장동 사건은 30년 시차에도 불구하고 비리 구조와 사건의 흐름, 숨어있는 핵심 실세에 대한 의혹까지 묘한 공통점이 있다.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사건은 1991년 초, 주공아파트를 지어 무주택자에게 저가 분양키로 했던 사업 부지를 민간 주택조합(개발업자)에 팔아버린 사건이다. 수서지구 땅을 사기 위한 갖가지 로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매각 불가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건설부가 느닷없이 토지 공급권을 서울시에 이관하고, 서울시도 입장을 바꿔 땅을 팔아버렸다.

수서 택지를 사실상 줍다시피 사들인 주택조합에 농협·경제기획원·서울지방국세청 등 유력 기관·기업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청와대와 당시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까지 서울시에 수서 택지 분양을 요청하는 협조 공문을 보낸 것이 드러나자, 결국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주택조합의 배후에 한보건설이 있었으며, 한보가 청와대·건설부·국회 등에 전방위로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수사 결과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청와대의 일개 비서관이 건설부와 서울시를 움직일 수 있었겠느냐’는 핵심 의혹은 풀지 않은 채 청와대 비서관과 여야 의원 등 9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끝내버렸다.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였던 수서와, 판교에 인접한 대장동은 모두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면 떼돈을 벌 수 있는 곳이다. 무주택자를 위한 주공아파트가 주택 사업자의 배를 불려줄 민간 아파트로 변할 뻔했던 수서나, 임대주택을 대폭 줄이고 분양가 규제를 받지 않는 민간 분양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는 대장동은 기본적으로 공공 권력을 등에 업고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막대한 폭리를 얻는 사업 비리 구조가 같다. 로비 대상에 야당 인사 이름이 여럿 등장할 만큼 광범위한 로비가 이뤄진 것이나, 당시 고건 서울시장이 특혜 분양에 저항하다 경질되고 후임 박세직 시장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수서와,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이 사퇴한 후 유동규 본부장이 직무대행으로 사업을 추진한 대장동도 묘하게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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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31일 저녁 구속영장이 발부된 한보그룹 정태수회장이 서울 구치소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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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사건은 그러나 4년 후 대반전이 일어났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 때 한보 정태수 회장이 150억원이 넘는 뇌물을 노 대통령에게 건넨 게 밝혀졌다. 권력이 몰락한 후에야 수서 비리 사슬의 정점에 대통령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확인된 것이다.

한보가 대통령까지 뇌물로 녹였다는 게 은폐돼 있던 그 4년 사이에 한보는 계속 사고를 쳤다. 후임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 등에게 뇌물을 뿌려 무려 5조7000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특혜 대출을 받아 흥청망청 써버린 것이다. 이 또 하나의 대형 비리 사건은 당시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 부도로 이어져 1997년 말 우리나라가 IMF 외환 위기를 맞게 되는 도화선이 돼버렸다. 대장동은 어떻게 될까. 수서 사건의 당시 검찰 수사가 핵심 의혹을 풀지 않았듯 대장동에 대한 현재의 검찰 수사 역시 ‘유동규가 천문학적 이익을 민간에 몰아주는 구조를 혼자 다 짤 수 있었겠느냐’는 핵심 의혹을 풀지 않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수서 사건에서 보듯 진실은 부패를 비호하는 권력이 무너진 후에야 밝혀질 공산이 크다.

권력과 결탁한 부정 비리 세력은 그 권력이 건재하는 한 탐욕의 아가리를 절대 스스로 닫지 않는다. 탐욕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지게 돼 있지만, 탐욕과 결탁한 권력은 늘 국민의 이름을 팔며 버텨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서와 대장동은 깨어있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하고도 통렬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김덕한 에버그린콘텐츠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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