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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국사람, 제발 한국어 좀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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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필리핀 엄마, 한국 딸 선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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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선희(가명·20)는 돌쟁이 때 필리핀에 보내져 이모 손에 자랐다. 이모와 두 삼촌, 다섯 사촌 사이에서 심심할 새도 없이 복닥거리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19 회오리에 휘말려 한국으로 밀려왔다.

필리핀 엄마, 한국 아빠 둔 선희

갓난 시절 필리핀으로 보내진 뒤

엄마에게서 온 ‘발릭바얀’ 상자


필리핀에 처음 갔을 때 어땠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나요. 내가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때였대요. 맞벌이였던 엄마 아빠는 나를 키워가며 일하기 너무 힘들어서 나를 필리핀 이모한테 맡겼다고 해요. 나는 사촌들 틈에 끼어 와글와글 행복하게 자랐어요. 엄마가 보내준 발릭바얀 상자를 받을 때는 어깨가 으쓱했어요. 발릭바얀 상자가 뭐냐고요? 음…. 그것은 필리핀 사람들의 선물 상자예요. 외국에 있는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선물을 보낼 때 이 상자에 담아 보내면 세금도 면제되고 싼 운송비로 가족에게 전달해주거든요. 엄마가 보내준 상자에는 온갖 과자와 사탕, 예쁜 옷과 가방, 신발, 최신 유행 화장품, 학용품, 작은 전자제품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엄마는 좋은 것이 생길 때마다 상자에 다 넣었다고 해요. 상자가 오면 우리 집은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어요. 다들 너무 신나서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달려들어 상자를 열고 하나씩 꺼내면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서로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고 선물을 나눠 가졌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요. 보고픈 사촌들!

엄마는 가끔 필리핀으로 나를 보러 왔는데 아빠는 영상통화를 제외하곤 이번에 와서 처음 만났어요. 영상통화 할 때도 아빠는 엄마 어깨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계속 선희야, 선희야 하고 이름만 불렀어요. 아빠는 필리핀 말을 모르세요. 나 역시 그랬어요. 엄마가 채근하면 간신히 ‘안녕하세요, 아빠’ 하고 말했을 뿐이죠. 나는 한국말을 몰라요. 아빠가 씨익 웃고 화면 밖으로 퇴장하시면 엄마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 폭풍 수다를 떨었어요. 내가 한국에 와 있어도 아빠는 며칠에 한번 집에 오세요. 건설현장에서 미장 일을 하는데 전국을 다 돌아다닌다고 해요. 아빠는 집에 올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망고를 사 오셨어요. 선희야~ 하면서 망고가 든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고 식탁에 올려놓죠. 나는, 아빠 땡큐, 같은 말을 재빨리 하고 싶지만 어물쩍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아요. 벌써 몇달째 이러고 있어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망고를 먹었는데, 나중에 마트에서 망고 가격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뭉클해졌어요. 아빠가 나를 위해 이 비싼 것을 사셨구나! 하지만 명랑한 땡큐 소리가 째깍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필리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원래 계획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 한국에 오는 거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갑자기 계획이 틀어졌어요. 필리핀 코로나 상황이 무척 안 좋아지면서 엄마가 빨리 오라고 성화를 했어요. 어차피 온라인 수업이니까 한국에서 공부해도 된다고 말이죠. 나는 필리핀 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위험한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데, 나 혼자만 안전지대로 도망 왔잖아요. 처음엔 싫다고 했다가 엄마가 자꾸 울어서 마음이 흔들렸어요. 사촌들도 어서 가라고 등을 다독여줬어요.

한국에 오니 대뜸 나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어요. 선.희. 필리핀에서는 나를 써니라고 불렀거든요. 엄마도요. 나를 선희라고 부른 것은 영상 속의 아빠뿐이었죠. 내 이름이지만 나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요. 지금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아질 거예요. 내 이름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니, 너무 웃픈 일이에요.

성인 돼 부모 있는 한국에 처음 와

친구와 말 배울 곳 어디 없나요?

선희와 써니의 어디쯤


한국에 와서도 학교 온라인 수업을 착실히 들어야 해서 집에 콕 박혀 있어요.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가시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점심을 먹어요. 틈날 때마다 필리핀의 사촌들, 친구들과 채팅을 해요. 외로움을 날리는 유일한 방법이죠. 항상 시끄럽고 웃음이 넘쳐나던 필리핀 집이 그리워요. 한국 친구를 사귈 기회는 없었어요. 가장 급한 것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인데, 한국어 가르쳐주는 데를 찾지 못해 한참 헤맸어요. 사회통합프로그램, 다문화센터 같은 데 물어봐도 내가 한국인이라서 안 된다고 해요. 외국인이면 되는데 한국인이니까 안 된대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어이없고 화나지만 꾸욱 참았어요. 내가 화내면 엄마가 더 미안해하니까요. 한국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 엄마는 자꾸 내 눈치를 살펴요.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못한다고?’ 주변에서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궈져요. ‘좀 일찍 데려오지 그랬어. 어차피 한국에서 살 건데 한국에서 공부시켰으면 더 좋았잖아.’ 엄마 친구들 걱정도 그다지 고맙지 않아요. 뭔가 크게 잘못해서 책망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나는 용기를 잃어가는 마음을 가만가만 다독여요. 나는 지금 선희와 써니 사이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어요.

내 사정을 알아주는 이도 없고, 필요한 정보를 찾기도 너무 어려워요.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어쩜 한국어 가르쳐주는 기관 하나 없는지 모르겠어요. 정보를 알려주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려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어요. 내 손을 잡고 이리로 가면 된다고 안내해 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내 또래 한국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같이 수다 떨고 떡볶이 먹으러 갈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 한국어는 정말정말 필요해요. 제발 한국어 좀 가르쳐 주세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의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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