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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제 결혼이 불편하세요?… 축복받지 못한 열도의 로맨스 [S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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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 행보로 대중적인 인기 마코 공주의 결혼 발표로 日 흥분의 도가니

상대인 평민 출신 고무로 모친 빚투 불거지자 국민 90% “이 결혼 반대”

일본서 왕실은 신의 영역·별격의 존재로 인식

왕실 일가의 인권·개인적 감정은 별개로

흠집 있는 평민의 왕실 합류 좌시 못해

비난 시달리던 마코공주 결국 PTSD

세계일보

마코 공주(왼쪽)와 ‘꽁지머리’의 약혼자 고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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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기자회견에 나선 마코 공주와 고무로 게이는 ‘꿀 떨어지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드러냈다. 약혼 소식을 전하는 자리였다.

“태양처럼 밝게 웃는 고무로의 미소에 끌렸다.”, “공주는 달과 같이 조용하게 나를 지켜봐주는 존재다.”

지난 1일, 4년여 전 약혼 소식을 전하며 행복에 겨워하던 마코 공주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의사가 전한 병의 원인과 증상은 짠하기만 하다.

“비방 중상을 장기적으로 경험한 게 원인이다. 결혼 후에도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질환의 원인을 제공한 고무로는 ‘국민 밉상’이 되어 있었다.

지난 4년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둘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공주와 평범한 샐러리맨의 신분을 넘어선 사랑, 고무로의 가족사에 얽힌 스캔들과 결혼 연기, 해외 유학, 언론의 집요한 관심…. 이 모든 게 합쳐진 결과가 국민 절대다수의 결혼 반대다. 어째서 일본인들은 두 젊은이의 앞날을 축복하기는커녕 실망 혹은 적의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일까. 오는 26일, 예식도 없이 부부의 인연을 시작하는 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을 찾아가다 보면 만나는 것은 일본인들 특유의 ‘천황과 황실’에 대한 특별한 인식과 감정이다.

◆‘축복할 수 없다’… 국민이 반대하는 공주의 결혼

마코 공주는 일본 왕위계승 1순위인 후미히토 왕세제의 장녀다. 그러니까 나루히토 일왕의 큰 조카다. 신분이 워낙에 특별한데다 소탈한 언행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대학 시절 학생 식당을 종종 이용하고, 이코노미클래스를 이용한 소박한 해외여행 등으로 이미지가 좋았다. 로펌에서 변호사도 아닌 사무원으로 일하는 고무로를 평생 반려자로 선택했을 때 ‘마코답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왕위계승 2순위인 남동생 히사히토 왕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란 기대도 받았다. 애초 일본인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했다.

그러나 약혼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12월, 고무로의 어머니 가요와 관련된 돈 문제가 불거지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2002년 남편과 사별한 가요가 한때 교제한 남성에게 400만엔(약 4100만원)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는 것. 고무로 측은 “증여라고 생각했다”고 강변했으나 ‘고무로 모자가 왕실에 돈을 빌리려 했다’, ‘신흥종교에 빠진 적이 있다’ 등 온갖 의혹들이 쏟아졌다. 여론이 악화되자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청은 2018년 2월 결혼 연기를 발표했고, 6개월 뒤 고무로는 도망치듯 미국 뉴욕의 로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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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대체로 ‘마코·고무로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는 것들이었다. 그 결과가 국민 90%가량의 결혼 반대다. 지난 3월 주간아사히는 응답자의 97.6%가 결혼에 대해 ‘좋지 않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지난달 온라인매체 아에라닷컴의 조사에서는 91%가 ‘축복할 마음이 없다’고 답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지난 5일 공개된 문춘 온라인 여론조사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결혼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83.7%의 의견 중 구체적인 내용 몇 가지다.

“고무로는 이런저런 의혹을 해결하거나 대응하지 않는 것 같다.”

“마코 공주에 대한 고무로의 애정을 느낄 수 없다. 한마디로 황실 권위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결혼이 현실화되면 황실 이탈이 일거에 가속화될 것이다.”

부정적 인식의 대부분은 고무로를 향해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들은 적개심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지난달 27일 3년여 만에 귀국한 고무로의 ‘꽁지머리’ 헤어스타일에 시비를 거는 듯한 언론의 반응이다. 한 스포츠지는 1면에 ‘포니테일(말총머리) 귀국’이란 제목을 달고 고무로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까지 실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머리 모양의 획일성이 사회규범의 존중을 의미하는 일본에서 고무로의 장발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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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은 부정적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만 마코 공주의 결심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아버지 후미히토 왕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고 기뻐하는 상황은 아니다”면서도 결혼을 허락했다. 나루히토 일왕도 비슷한 말로 동생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의사을 보였다.

문제의 발단인 돈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숱한 반대도 여전하지만 마코 공주와 고무로는 오는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결혼을 공식화한다. 그러나 왕실 구성원이면 누리는 성대한 예식과 축복, 1억5000만엔(약 15억4000만원)의 지원금은 없다. 일본 언론은 이날의 회견이 “마코 공주의 각오와 고무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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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 공주(오른쪽)와 약혼자 고무로 게이. 도쿄=AF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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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세계 속의 존재”… 왕실을 향한 일본인의 시선

‘마코·고무로 로맨스’를 두고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보면 떠올려봄 직한 의문이 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엔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결혼 문제다. 남들이 뭐라 하든 두 사람은 사랑하고, 결혼을 원한다. 이게 여론조사 대상이 될 일인가가 일단 의문이다. 여기까지야 공주라는 특수한 존재가 관련된 것이라 그렇겠거니 해도 사실상 국민 전부가 반대한다는 결과는 어떻게 가능한 건가 싶다. 심지어 결혼 반대를 주장하는 시위도 있었다. “결혼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는 마코 공주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일본인들이 모를 리 없지 않나. 여기서 ‘천황과 황실’을 향한 일본인들의 시선을 감안해야 한다.

한국에 거주 중인 한 일본인은 “우리에게 황실 사람은 꿈꾸는 세계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 헌법에 규정된 일왕의 지위다. 최근 ‘소확행하는 고양이’라는 책을 발간해 일본 사회를 전반적으로 소개한 정순분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일왕은 ‘신의 역할을 부여받은 인간’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일왕과 왕실 구성원들에게는) 인권조차 보장이 안 되는 부분이 있고, 개인적인 감정이 존중되지 않기도 한다. (전통적인) 왕가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 해주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

이런 인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형성된 역사의 산물이고,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라 상상 이상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원우 연구위원은 “오랜 전통,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일왕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은) 거의 맹목적이며 애정, 경외심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코 공주 결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상대가 “터무니없어 보이는” 고무로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본인들에게 역사와 전통, 정체성을 흔드는 일로 비칠 수 있다. 국민 90% 가량의 반대가 자리잡고 있는 지점이다.

마코 공주의 결혼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일왕과 왕실을 향한 시선, 관련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강력한 반대 여론이 왕과 왕실은 달라야 한다는 강한 바람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이 연구위원은 “왕실은 달라야 한다고 믿는 일본인들에게 고무로는 (공주의 결혼 상대로) 워낙에 엉뚱하다. 결혼 반대 여론은 왕실의 존엄을 보존하려는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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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코 왕비(왼쪽), 미치코 상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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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못낳아서… 평민 출신이라… 고통받는 日왕실 여성들

마코 공주가 PTSD를 앓고 있다는 소식은 정신건강 문제로 고통을 겪은 일본 왕실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키히토 상왕의 부인 미치코 상왕비, 나루히토 일왕의 부인 마사코 왕비가 그들이다. 이들은 강력한 남성 중심의 왕실 질서에서 비롯되는 압박에 시달렸다.

미치코 상왕비는 1959년 평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세자비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으나 결혼 후 왕족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특히 시어머니에게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멸당했고, 보수적인 왕족·화족(귀족)들은 그의 대중적 인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미치코 상왕비는 왕실 여성들에게 ‘드레스코드’를 제대로 안내받지 못해 혼자 튀는 옷차림을 하거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등 오랫동안 괴롭힘이 축적되어 수차례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고, 결국 실어증에 걸려 장기요양을 했다.

마사코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갖은 괴롭힘을 당했다. 미국 하버드대, 일본 도쿄대를 졸업한 마사코 왕비는 진취적인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나 나루히토 일왕의 오랜 구애를 받아 결혼하면서 성공한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꿈을 접었다. 왕세자비가 된 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임신을 하지 못하면서 ‘불임 왕세자비’라는 비난을 받았고, 극우세력은 ‘왕세자가 재혼해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아들 출산을 강요하며 해외순방까지 금지되는 등의 수난을 겪다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나루히토 일왕과 마사코 왕비는 슬하에 아이코 공주 하나를 두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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