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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경쟁 끝은 죽음, '오징어게임2'까지 모두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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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한국식 공정의 허구 폭로한 잔혹극

* 주의! 이 글에는 <오징어 게임>의 주요 줄거리 및 결말의 일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우리 사회가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성장의 도구 '경쟁'에 관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표상했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적절히 성공의 계단으로 이용한 바 있는 한국식 '공정한 경쟁'의 해부도가 펼쳐진다.

이준석은 목동 월촌중학교 시절이 자신이 경험한 "가장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2019년 펴낸 대담집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부 잘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의 승자였던 그는 그 승리를 발판으로 과학고, 하버드 대학으로 나아갔다.

한국에 돌아와 첫 직장에서 박근혜 키즈란 타이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자신의 출발점 월촌중의 아름다운 경쟁의 추억을 사회에 도입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청년세대를 사로잡는다. 마치 하버드 입성이란 상징 자본 자체가 결승점인 듯, 출발점인 중학교에 영광을 바치며 스스로를 성공 모델로 놓는 그의 모습은 한국식 공정의 슬픈 우화를 구성하는 한 장면이다.

세상은 온전히 경쟁으로만 굴러가고, 그것을 공정한 경쟁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 믿는 사회에선 99%의 부를 경쟁에서 승리한 1%가 갖고, 1%의 부를 99%가 나눠 갖는 모순에 함구한다. 결과가 아무리 개떡 같아도 그게 공정한 경쟁의 결과라면. 다만 너희에게 던져진 1% 만큼은 경쟁에 승리하는 자에게 공정하게 준다. 오케이? <오징어 게임>은 우리 사회가 봉착한 한국식 자본주의적 가치의 진수인 공정한 경쟁의 모순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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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같은 옷, 같은 식사, 같은 잠자리, 공정하게 주어지는 번호 선택의 기회, 과반이 원치 않으면 게임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민주적' 시스템, 게임을 사전에 유출해 공정의 원칙을 위배한 자와 거기에 협력한 자 모두 제거될 만큼 철저한 '평등'의 규칙으로 게임은 굴러간다.

패자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제 발로 다시 찾아든 사람들. 그들을 이 미친 게임으로 밀어 넣은 것은 한 조각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지옥이 된 세상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들에게 이 '공정'하고도 잔인한 게임판을 제공하고 뒤에서 웃고 즐기는 자들이 바로 그 지옥의 설계자들이란 사실이다.

일상이 된 디스토피아

2008년엔 기괴하게 느껴져 퇴짜맞았던 시나리오가 2021년 9월 방영 2주 만에 넷플릭스가 있는 모든 나라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감독은 2008년에 대본을 처음 썼다고 밝혔다. 그의 첫 장편영화 <마이 파더>(2007)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내려온 뒤였다. 빚을 졌고, 패자에게 냉정한 한국의 자본주의의 속성상 감독으로서의 앞날도 불투명했다.

그는 서바이벌 게임을 다루는 영화나 만화를 보며, 자신도 이런 게임에 참여하면 어떨까 상상했다고 한다. <오징어 게임>의 상우처럼, 서울대를 나오고 최소한 동네 천재로 추앙받는 유년을 누렸을 그가 빚에 짓눌리던 자신을 만화로 간신히 부스팅 하면서 쓴 대본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다. 불닭볶음면 맛의 얼얼한 일상이 굽이굽이 무심하게 펼쳐지는 한국 사회는 그래서 희로애락의 진미가 바글바글 끓는 훌륭한 서사의 재료이기도 하다.

2008년은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다. 그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예고했다. 이듬해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고, 꺼이꺼이 울며 그를 보낸 김대중도 뒤를 따라갔다. IMF 구제금융 체제를 신속히 극복한 조국에 가슴 벅차던 기억이 선연하건만, 그 무렵 우린 '헬조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대본이 쓰인 지 12년이 지난 2020년 지구촌 구석구석은 바이러스 공포에 뒤덮였다. 영화, 만화, 소설로 수차례 보아왔던 일이 현실 버전으로 전개되었다. 매일, 먼 나라에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방송 보도가 숨 가쁘게 이어졌고, 사람들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온 세계가 바이러스로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민주주의, 인권 따위는 죽음의 공포 앞에 멈춰 섰다.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학교가 폐쇄되고, 도시는 봉쇄되었으며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는 것이 당연해졌다.

마스크 속에 서로의 존재를 가두며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소외되었다. 접촉이 범죄가 되고 타인이 위협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서로의 감시자가 되었다. 그런 지옥 같은 현실에서 하나의 희망의 밧줄이 내려졌으니 그것은 백신이었다. 급히 제조되어 임시 허가를 달고 나온 백신의 위험을 지적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은 지옥을 암울하게 견디느니 백신이란 밧줄을 타고 탈출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이들이 1차, 2차를 통과했으나 고대했던 해방의 그날은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다. 대신 3차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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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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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판타지일지언정 드라마 촬영은 현실이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드라마, 영화, 예능 등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마스크 착용의 원칙이 지켜진 적은 없다. <오징어 게임>은 절반 이상의 인물이 가면을 쓴 모습으로 나오는 초유의 드라마다. 나머지 절반은 세상 끝으로 밀려나 목숨을 건 회생의 기회를 찾아 모여든 세상의 루저들이다.

두 부류에게서 관객은 자신을 발견한다. 유니폼, 가면으로 정체성이 배제된, 도구로만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만, 자아가 제거된 존재다. 가면 뒤에 갇힌 인간은 패자를 제거하는 역할을 기계처럼 수행하면서 생존을 구한다. 게임에 임하는 사람들은 제 얼굴을 드러내고 인간의 목소리와 표정을 갖고 살아가지만, 자본가들이 제시한 놀이에 경주마로 뛰어들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생존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공정한 경쟁'을 집행하는 자, 거기 뛰어든 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제시되는 건 죽음이다.

쌍문동 천재와 쌍용차 해고노동자

공장 노동자였던 동네 형(기훈)과 서울대를 나온 동네 천재(상우)가 나란히 나락으로 떨어져 게임장에서 만났다. 기훈에게 상우는 어릴 적 함께 놀던 살가운 친구지만, 상우에게 기훈은 제쳐야 할 하나의 경쟁자일 뿐이다. 잠시 연민이 발동하여 힘든 선택을 한 기훈을 불러세우지만 경쟁에 단련된 상우의 관성은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세상의 놀이 중 남자에게 유리한 게 훨씬 많다는 사실 또한 경쟁에 익숙한 자가 축적한 상식이다. 어떤 게임이 제시될지 모르니 여성이 있어도 나쁠 것 없다며 한 팀이 된 여성들을 내치지 않는 건, 져본 경험이 더 많지만, 여전히 사람의 온기를 지닌 기훈의 성정이다.

노인의 조언에 따라, 줄다리기 선두엔 팀원들이 가장 믿는 사람이 섰다.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상우가 아니라 기훈이었다. 팀원들 간에 순식간에 이뤄진 암묵적 합의는 서울대 수석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매 순간 보여준 기훈이었다. 결국 노인의 지혜와 상우의 순발력, 알리의 지구력, 팀원 전체의 단합이 모여 그들은 이겼다.

노인의 경험이 전체를 설득할 수 있었던 계기 또한 기훈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으니 그의 역할은 서로의 장점이 융합할 수 있게 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적 힘의 열세를 극복하게 해준 힘의 근원은 협업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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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기훈(오른쪽)과 상우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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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게임은 목적을 향해 한치의 오차 없이 나아가는 냉철한 수재와 끝까지 인간을 버리지 않은 기훈의 대결이다. 기훈은 결국 "함께 살자"고 청하지만, 그것은 상우가 아는 게임의 룰이 아니다. 드라마는 기훈이 맞이한 결말이 생과 사의 좁은 통로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연금술이 빚어낸 결과임을 정교하게 설득해낸다.

가진 게 없는 중년의 루저가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 그것은 매 순간 멤버 간의 긴장을 어루만지며 잠시나마 인간으로 존재하게 해준다. 차가운 도시락을 덥히는 교실 안 난로처럼. 그는 도시락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난로가 되어 그 주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훈훈하게 녹이는 힘을 가졌다. 극한 상황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인간의 미덕은 결국 무엇일까 묻게 된다. 경쟁에 최적화된 차가운 인간의 두뇌? 양아치의 단단한 주먹과 비상한 잔머리? 아니면 사람에게 남은 한 가닥 인간성을 움직이는 온기?

'함께 살자'와 '승자는 하나뿐'

기훈은 쌍용자동차(극에선 드래곤 모터스) 해고 노동자로 나온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쌍용차를 쉬운 해고의 본보기를 보여줄 정권과 노조의 승부처로 삼았다. 노조는 회사가 어렵다면 우리도 고통을 분담할 터이니 "함께 살자"며 회사의 결정에 저항했다. 결국 정부가 감행한 폭력으로 77일간의 쌍용차 파업은 막을 내렸다.

눈앞에서 경찰의 폭력에 죽어간 동료의 죽음은 기훈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트라우마다. "지들이 잘못해서 회사 망하게 해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웠다"라고 기훈은 말한다. 더 정확히는 "지들이 장부 조작해서 가짜로 적자 만들어 놓고, 그거 핑계 삼아서 우리를 내쫓았다"라고 해야 옳다.

당시 사측은 회계장부 조작을 통해 장부상 막대한 적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근거 삼아 대규모 해고를 강행했다. 이는 노동자들만이 알고 있는 감춰진 진실이 아니라 당시의 해고가 위조된 회계장부에 의한 불법 해고였음을 인정하며 노조의 손을 들어준 2심 재판부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기도 하다.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 양승태(당시 대법원장)의 사법 거래가 진실의 목을 다시 한 번 비틀었을 뿐(대법원 3부 2014년 11월 파기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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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오전 8시 10분 쌍용자동차 조립 3,4팀 옥상 점거에 성공한 경찰특공대가 쓰러진 조합원을 삼단봉과 곤봉으로 집단구타하고 있다. 2009.8.5 ⓒ 노동과세계 이명익



여전히 쌍용차가 돌아가고 있는 것 또한 당시 파업하던 노동자에게 빚진 바 있다. 이명박은 공장 내 모든 전기를 차단하라 지시했다. 자동차 공장 안에는 24시간 돌아가야 할 도장 공장이 있다. 그것이 하루라도 멈추면 공장은 고철 더미가 되어 영원히 문을 닫아야 한다. 이명박에겐 쌍용차가 사라지더라도 저항의 싹을 자르는 게 더 중요했다. 공장의 전기가 차단되자 고장난 발전기를 고쳐 공장의 숨통을 이어놓은 사람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이다.

이는 쌍용차 사장이 파업 주도 혐의로 수감되었던 한상균 지부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에서 드러난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러한 내용을 담아 노동자들의 "함께 살자"는 구호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더불어 함께 살고자 투쟁했던 노동자들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연거푸 배반되는 정의, 지켜지지 않는 약속 속에서 하나둘 세상을 등졌다.

유리 다리를 건너는 게임에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은 앞서간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들의 생명은 혼자의 것이 아니다. 10년 넘게 복직 투쟁을 하던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향해 사람들은 묻곤 했다. 왜 저들은 아직도 복직 투쟁을 하는지. 마지막까지 남아 싸운 사람들은 그 사이 죽어간 사람들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거다. 홀로 살아남은 기훈이 산 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결심한 듯 비행기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던 것처럼.

스펙터클 사회

기 드보르는 1963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선 자아와 세계의 경계,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소멸"되며 "가상의 조직이 믿게 하는 허위의 이미지는 개별적 인간에 의해 경험된 모든 진리를 억압하며, 스펙터클에 지배된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휩쓸린다"는 사실을 설파한 바 있다.

바이러스가 퍼진 우한 거리에서 픽픽 쓰러지던 사람들, 공동화된 도시, 폐쇄된 도시로부터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코로나 공포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그 후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코로나에 걸려 길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을 본 일이 없고 사망자 대부분은 기저질환을 가진 80대 이상임이 드러나도, 공포는 여전히 다중을 지배한다. 미디어가 그것을 쉼 없이 전파하기 때문이며 미디어를 지배하는 자본과 권력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과 방송이 다른 이야기를 일제히 내놓지 않는 한 현실에서의 어떤 경험도 다중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스펙터클 사회의 원칙이다.

팬데믹의 혼란에 여전히 장악된 세상에서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많은 대중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세상 주류 언론들의 각별한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마치 이걸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끼어들 수 없을 것처럼 공들여 선동하는 서구 언론의 모습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말할 이유를 찾은 국내 언론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차원이다.

주류 언론들이 한 입으로 열심히 뭔가를 합창하고 있을 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권력과 자본이 원하는, 최소한 허락하는 메시지란 의미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모든 소설과 영화는 인류를 향해 위험을 경고하는 동시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자본의 입장에서 드라마가 전하는 어떤 메시지가 마음에 드는 건지는 차차 두고 볼 일이다.

게임과 지옥의 설계자들

드라마에서 가장 대범했던 장면은 VIP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부자들의 범죄적 유희는 VIP들과 함께 소아성애를 즐기던 제프리 엡스타인의 섬을 연상케 한다. 가면을 쓰고 유희를 즐기러 등장하는 남자들, 그들이 널부러져 게임을 관전하는 방의 장식들과 기괴한 가면들은 웹상에 돌아다니는 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의 파티 장면 이미지와 유사하며, 스탠리 큐브릭의 마지막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가면 파티 장면과도 겹친다.

그것은 남들이 보아선 안되는 철저히 가려진 장막 속 세계다. 게임의 설계자들이 그 게임의 말이 된 자들 등 뒤에서 낄낄대며 즐기는 금기의 세계. 드라마는 직설적으로 그들이 쳐놓은 두꺼운 커튼을 들춰 카메라를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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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VIP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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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가진 남성의 몸을 즉물적으로 조롱하는 장면은 스크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그것은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존중되는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수컷이 누리는 특권이다. 감독은 금기를 깨며 당신들이 겪고 있는 당연하지 않은 불행의 설계자를 지목한다. 그날 이후, 기훈이 보낸 일 년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 혹은 그 게임을 더 공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달라질 세상은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머리를 붉게 물들인 기훈이 결심한 듯 향하는 길이 어디로 닿는지는 아마도 2부에서 볼 수 있을 터. 그때까지 모두 무사히.

목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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