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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의 아이러니] ‘오징어 게임’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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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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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법률자문을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니,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문화예술계에는 법률자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분쟁이 벌어지면 뒤늦게 변호사를 찾는 실정이었다. 저작권 관념이 느슨해서 권리관계도 혼란스러웠다. 영화 제작 과정에 사용하는 계약서는 달랑 한 장짜리였다. 동일한 양식에 ‘역할’만 공란으로 남겨져 있어서, 공란에 ‘감독’이라고 적으면 감독계약서가 되고, ‘작가’라고 적으면 작가계약서가 되는 수준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사전심의제도로 억압받고 있었다. 재능들이 모이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으나 토양은 척박했다. 세월이 흘렀다. 제작 현장이 전문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전검열이 위헌 결정을 받아 철폐되었고, 저작권은 공고하게 제도화되었으며, 계약서는 점점 두꺼워졌다. 얼마 전 영화 스튜디오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거대한 세트에 구현된 달 표면에서 아이돌 출신의 배우가 우주복을 입고 연기하고 있었다. 감독과 스태프들은 수십m 높이의 크레인과 여러 대의 모니터를 통해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튜디오가 낯설지 않은 나로서도 눈부시게 발전한 현장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앞으로 수많은 <오징어 게임>이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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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 변호사


종사하는 일의 특성상 영상업계의 사람들과 왕래가 적지 않은데, 이 분야의 세계적 발전과 함께 개인적으로 먼저 연락을 취하면 결례가 될 것 같은 인물이 점점 늘어난다.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배우에게도 축하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바쁜 사람을 번거롭게 할까 봐 단념했다. 받을 수만 있고 보낼 수는 없는 연락처가 늘어나는 것이 나로서는 무척 즐겁다.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논란 중 하나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넷플릭스가 번다’는 주장이다. 넷플릭스가 1조원을 벌 때 감독과 제작사의 주머니에 남은 돈은 모두 합쳐도 수십억원 아래일 것이므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제작사도 감독도 그리고 배우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세계적인 평판을 얻었다. 그 이름값은 이들이 누군가와 새로운 계약을 할 때 엄청난 협상력으로 작용하니 결국 경제적 이익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 이름값은 전 지구에 광속으로 콘텐츠를 공급하면서도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는 회사와 일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큰 이익을 얻는 게 배가 아프면 지금이라도 증권계좌를 만들어 오늘 밤에 열리는 미국 증권시장에서 넷플릭스 주식을 사면 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디즈니와 애플의 OTT도 곧 한국시장에 진입한다. 이미 한국의 창작자들과 드라마 제작에 착수했다. 한국의 OTT 업체들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OTT 업체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면 창작자의 협상력이 높아진다. 내가 OTT 후발주자라면 넷플릭스 독주체제를 깨기 위해 과감하게 창작자와 수익을 공유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영상 콘텐츠는 미국 일색의 분위기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그 경쟁력은 수많은 인재들, 어렵게 쟁취한 표현의 자유, 틀을 갖춘 제작 시스템, 그리고 높은 생산성을 가진 사회적 인프라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스태프 처우의 개선을 비롯한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 동서양의 사상과 종교와 언어를 동시에 이해하는 나라로서, 짧은 시간에 봉건제에서 군사독재를 거쳐 현대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식민과 분단, 전쟁과 평화, 굶주림과 풍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극심한 분열과 통합을 경험한 나라다. 한국 문화 콘텐츠의 남다른 활력은 이러한 유례 없이 빠른 변화와 혼란과 진통의 용광로에서 제련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창작하면 그 결과가 좁은 나라를 넘어 전 지구에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선망하던 서구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입장과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나라가 <오징어 게임>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고통과 모순과 갈등을 여전히 껴안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비판적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다면 발전은 지속될 것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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