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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기억할 오늘] 호찌민이 무릎 꿇은 유교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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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베트남 여성의 날
한국일보

중기관총으로 전장에 나선 1967년의 북베트남 여성 전사들. flickr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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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호찌민은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10월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개칭)을 창당하며 양성 평등을 당 강령에 못 박았다. 여성 차별과 착취를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와 15세기 이래 유입된 가부장적 유교 이념을 극복하고 전통을 복원한다는 민족주의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그해 10월 20일, '베트남여성협회(VWA)가 공식 출범했고, 당은 이날을 '베트남 여성의 날'로 제정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반제 혁명 전쟁을 앞둔 그에겐 여성 전사들의 헌신이 절실했다.

당은 서기 1세기 중국 후한 지배하의 베트남(당시 남비엣) 자매 쯩짝과 쯩니의 해방운동을 적극 부각했다. 어려서부터 무예와 군사 전술을 익힌 쯩 자매는 서기 40년 압제하의 민중을 규합해 후한 점령군을 몰아냈고, 언니 쯩짝은 왕위에 올랐다. 3년여 뒤 토벌군에 의해 진압당해 자매는 처형됐지만, 그들의 존재는 통일 이후 수도 하노이에 동상과 함께 '하이바쯩(쯩 자매) 거리'라는 지명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자매의 후예들은 프랑스-미국 군대와의 전쟁에서 후방 지원뿐 아니라 최전방에서, 남베트남 도심게릴라로, 남성과 대등하게 활약했다. 국제사회가 기념하는 3월 8일 '여성의 날'이 노동 평등에 기원한 날이라면 베트남 여성의 날은 전통과 해방전선의 결절점으로서의 포괄적 여성인권을 상징한다. 베트남 정부와 시민들은 두 날을 함께 기린다.

하지만, 열강을 잇달아 물리친 호찌민도 유교적 가부장제 관습에는 투항했다. 서구 사회가 2차대전 이후 전장에서 돌아온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직장을 되돌려주며 서구 특유의 '가족(가정) 이데올로기'로 합리화했듯이, 1970년대 혁명과 통일 이후 베트남 여성들도 다시 가정으로 밀려나야 했다. 당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묵인하고 동조했다.

세계경제포럼(WEF) 발표, '세계성차별리포트(Global Gender Gap Report)에 따르면, 베트남의 성평등 순위는 156개국 중 87위(2021년 보고서)다. 한국은 102위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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