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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찬 칼럼]이건희 고문헌과 장자의 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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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로 문화계 전반이 위축되었지만 유독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다. 바로 미술·문화재 분야이다.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7·21~9·26)은 예약 만원사례 속에 전시를 끝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내년 3월13일까지)에도 관람객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다. 예약으로 무료관람할 수 있으나 예약권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암표로 거래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조운찬 논설위원


그렇다고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이 모두 공개된 것도 또 공개 일정이 잡힌 것도 아니다. 이건희 기증 컬렉션의 절반에 달하는 전적·지도·문서 등 고문헌은 수증된 지 반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수장고에 있다. 보존처리 등이 필요한 문화재가 많은 것도 원인이지만,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해 고문헌을 확인·분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회장의 유족으로부터 받은 고문헌은 4000여건, 1만여점이다. 국가가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 1만1023건, 2만3000여점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국보·보물만 수십 점이고 미공개 문헌이 수두룩하다는 소문이 돌지만, 여태 수증 목록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시회에 나온 기증 문헌은 <석보상절> <근사록> 등 몇 점에 불과하다.

이렇다보니 박물관이 기증 고문헌의 콘텐츠 활용을 위한 기반 구축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 서지학자는 “관련 학자들조차 기증 목록에 뭐가 포함돼 있는지 모르는 상태”라며 “학계에서 어떠한 논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서혜란 국립중앙도서관장은 지난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국감에서 “고문헌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면서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된다”며 “고문헌은 도서관으로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채익 문체위원장(국민의힘) 역시 고문헌은 박물관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야 편찬과 간행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박물관의 입장은 다르다. 기증 고문헌의 공개는 등록, 내용 분류, 목록 작성 등이 이뤄진 뒤에 가능한데 수량이 워낙 많은 데다 내용 파악이 쉽지 않은 전적들도 있어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년 초부터 해제 작업에 들어간 뒤 전시 등을 통해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박물관이 고문헌 해제뿐 아니라 DB 구축, 텍스트의 디지털화 등을 제대로 수행할지는 의문이다. 인력·예산도 문제이지만, 고문헌 활용서비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의 이건희 고문헌 이관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유물의 관리·전시가 주 업무인 박물관과 책의 보존 및 독서 진흥이 목적인 도서관은 역할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팔만대장경 판전(장경각)에 대한 상반된 인식만큼이나 크다. 오늘날 장경각은 대장경 목판을 보관하는 박물관이다. 장경 목판이 유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장경각은 도서관 기능이 더 컸다. 당시 대장경 목판은 언제든지 책으로 전환될 수 있는 ‘미래의 책’이었다. 비록 팔만 개의 목판을 모두 인쇄해 6802권의 책을 만들려면 몇 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장경각은 분명 책을 만들어 유포하고 읽게 한 도서관 기능을 수행했다. 이는 해인사 대장경 판전이 <세계의 도서관>(제임스 캠벨 지음)에 한국을 대표하는 도서관으로 수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독자의 손에서, 학자의 서재에서 읽히고 연구되어야 할 텍스트이다. 오래된 책인 고문헌도 마찬가지이다. <장자> ‘추수’편에는 죽어 사당에 모셔진 신령한 거북과 진흙탕을 헤집고 다니는 거북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를 맡아달라는 초왕의 제의에 장자는 귀하게 대접받는 죽은 거북보다 진흙탕이라도 자유를 누리는 거북으로 살겠다며 거절한다.

이건희 기증 고문헌 역시 박물관의 수장고나 진열장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목록과 해제집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문 DB를 구축해 대국민서비스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국민을 위한 일이고 기증자에 대한 예우이다. 박물관과 도서관이 각각 수증기관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관리권을 다툴 일도 아니다. 이참에 박물관, 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규장각, 고전번역원 등이 함께 이건희 고문헌을 조사·연구하는 연합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책은 유통이 생명이다. 이건희 고문헌이 수장고에 모셔진 ‘신령한 거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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