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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천연가스 쥐락펴락하는 푸틴, 에너지 무기화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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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천연가스 공급 동결 방침... 순식간에 천연가스값 최고 18% 올라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무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에너지 대란을 겪는 유럽에 천연가스를 충분히 공급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언과 달리 러시아가 공급량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유럽은 시간이 갈수록 푸틴과 러시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8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은 다음 달 우크라이나를 관통해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량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각국의 도매용 천연가스 가격은 하루 사이 최고 18% 급등했다. 대표적인 천연가스 선물 거래 시장인 네덜란드 TTF거래소에서는 이날 불과 5시간 사이에 메가와트시(MWH)당 89유로에서 100유로로 올랐다.

푸틴은 지난 13일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조절한다는 주장은 정치적 동기가 다분한 뒷말에 불과하다”며 “유럽이 요청하면 언제든 공급량을 늘릴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최근 1년 사이 천연가스값이 5배쯤 오르는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발생하자 이를 해소하는 데 일조하겠다며 안심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날 가즈프롬이 공급량 동결 방침을 밝히면서 푸틴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히려 최근 러시아의 공급량은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에너지 정보 분석 업체 ICIS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관의 하루 평균 공급량은 지난달 3억200만㎥에서 이달 2억6100만㎥로 줄었다.

조선일보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블라디미르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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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가스는 냉난방 원료로 쓰일 뿐 아니라 화학 제품, 유리, 종이 등의 가공에도 두루 쓰인다. 특히 유럽은 전기 생산 연료의 20%를 천연가스에 의지하고 있고, 이 비율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원전 비율을 줄이는 유럽은 신재생에너지가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천연가스에 의지해 전기를 만드는 게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기 생산 연료 중 천연가스 비율은 영국(36%), 이탈리아(45%), 네덜란드(59%), 아일랜드(51%) 등에서 특히 높다. 문제는 유럽 천연가스 전체 수요의 40%를 러시아가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노르트스트림2를 빨리 승인하라는 압력을 가하려는 것이라고 일간 텔레그래프는 보도했다.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 서부에서 발트해 해저를 지나 독일 북부로 연결되는 천연가스 수송관이다. 연간 공급량은 최대 550억㎥에 이른다.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2018년 착공한 노르트스트림2는 지난달 공사가 완료됐고, 가즈프롬은 이 가스관에 가스 주입을 시작하며 천연가스를 수출할 준비를 마쳤다.

미국은 그동안 노르트스트림2에 대해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탈원전을 추진 중이라 천연가스 확보가 시급한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나서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냈다.

변수는 독일이 정권 교체기를 맞아 사용 승인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총선에서 원내 1당에 올라선 중도좌파 사민당이 연정 파트너로 점찍어 협상 중인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은 모두 반(反)푸틴 성향이다. 일부 유럽의회 의원도 독일에 노르트스트림2 사용을 승인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러시아가 노르트스트림2를 빨리 승인하라며 공급량 동결이라는 실력 행사에 나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푸틴은 2009년 우크라이나를 거치는 천연가스관을 열흘 넘게 잠가 프랑스·이탈리아까지 피해를 입힌 적이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르트스트림2가 언제 승인되느냐만 남았을 뿐 가동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주요 4개 경로(독일·벨라루스·우크라이나·터키)의 천연가스 수송관이 완성돼 푸틴이 유럽의 에너지 시장을 움켜쥐게 된다. 푸틴이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나 외교, 안보 등의 이슈에서도 유럽 등에 압력을 가할 때 천연가스 공급 카드를 흔들어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럽은 ‘절대 강자’가 된 러시아 앞에서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겨울이 오면 난방용 천연가스 수요가 더욱 늘어난다. 미국 경제 전문 방송 CNBC는 “유럽이 단기적으로 러시아에서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면 당장에는 안도할 수는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대응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유럽에서는 원전과 신재생에너지를 키워 에너지 자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천연가스 공급을 둘러싸고 미·러 간 갈등이 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7월 바이든 미 대통령은 노르트스트림2에 동의하면서 ‘러시아가 새 가스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면 추가 제재를 가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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