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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여순사건·간첩조작…‘국가폭력 대물림 희생’ 묻히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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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73주기] 김용현·양기씨 부자의 비극

한겨레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김양기씨가 15일 전남 여수 자택에서 국가폭력 피해 상황을 말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씨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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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아니라며 보도연맹 가입 부친

1950년 7월 여수경찰서 호출 받은뒤

다른 120여명과 함께 총살당해

‘피고인은 1948년도에 발생한 공산분자들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가 검거돼 복역하고 6·25사변 발발 직후 처형된 망부 김용현의 유복자로 출생해 (중략)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면서….’

35년 전인 1986년 2월 간첩 누명을 쓰고 광주 505보안대의 모진 고문수사를 받던 김양기(71·당시 36)씨는 수사관들이 허위로 작성한 자신의 진술서 내용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버지의 사망 경위를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누구도 김씨에게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던 터였다.

김씨는 ‘요것들이 내가 어디 가서 암말도 못 하는 것을 알고 엮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서야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왜 43일간 고문을 받아야 했는지, 왜 간첩 누명을 써야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었죠. 옷도 제대로 못 입은 만신창이 상태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지난 15일 전남 여수시 삼일동에서 만난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김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그전까지 그저 경찰이던 아버지가 여순사건 때 반란군한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았다. 보도연맹으로 돌아가셨으니 ‘난 꼼짝없이 간첩으로 몰리겠구나’ 하고 자포자기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은 1986년

간첩 누명 쓰고 신군부에 끌려가

“아버지 원수 갚으려 간첩 활동”

고문당해 허위 진술서 쓰고 7년형

1970년부터 일본을 오가며 선원,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했던 김씨는 재일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 국내 산업단지 등 정보를 북한에 알려줬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1987년 12월 징역 7년을 확정받고 5년을 복역한 뒤 1991년 5월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씨는 2006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자신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같은 해 7월에는 아버지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김씨는 2008년 6월 고문수사 피해자로 인정받았고, 2009년 7월 광주고법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의 아버지도 그해 8월 진화위에서 전남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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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여순사건에 연루돼 복역하고 1950년 7월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희생된 김용현씨. 김양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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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위 조사 결과와 김씨 설명을 종합하면, 아버지 김용현(1921∼1950)씨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학업을 마친 용현씨는 도쿄 철도국에서 일하다 해방 직전 귀국했다. 용현씨는 한때 광양경찰서에서 근무하다 1946년부터 여수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용현씨는 반란군에게 끌려갔다. 당시 반란군은 친일 부역자나 경찰 등을 즉결처분하곤 했는데, 일본 유학에 경찰로 일한 경험이 있던 용현씨도 좋게 보였을 리 없었다. 용현씨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이번에는 진압군에게 고초를 당했다. 반란군에 협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용현씨는 광주교도소에서 8개월을 복역한 뒤 자신이 좌익이 아니라며, 좌익에서 전향한 이들로 꾸려진 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용현씨는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15일 여수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섰다가 다음날 다른 희생자 120여명과 함께 여수 애기섬(현 남해군 소치도) 앞바다에서 총살당한 후 수장됐다. 김씨가 모친 뱃속에 들어선 지 8개월 때였다.

김씨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여수에서 여순사건은 최근까지 금기어였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도 서러운데 나까지 간첩으로 몰렸으니 지난 30여년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김씨의 부인 김희유(66)씨는 “법원과 진화위를 쫓아다니던 그때 남편 눈빛은 꼭 누구를 잡아먹으려는 듯했다. 남편에게도, 가족에게도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고 회상했다.

2006년 진실화해위 진상규명 신청뒤

2009년 재심서 무죄 선고 받고

2020년 아버지 피해 인정받았지만

“아직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유족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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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김양기씨가 2009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기록들.김양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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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김씨는 진화위 보고서를 근거로 2012년 8월22일 국가를 상대로 아버지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에서는 이겼지만 보수색이 짙었던 양승태 대법원(주심 민일영)은 김씨가 진화위 진실규명 통지서를 받은 2009년 9월11일이 아니라 진실규명 결정일인 2009년 8월18일을 기준으로 손해배상 시효 3년을 계산해야 한다며 결론을 뒤집었다. 결국 나흘 차이로 시효가 지났다며 국가에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김씨는 헌법소원을 냈고, 2018년 8월 헌법재판소는 “민법이 정한 시효를 과거사정리법에 적용하는 것은 국가배상 청구권 보장 필요성을 외면한 것”이라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김씨는 결국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아버지의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현재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땅에서 조그만 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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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여순 사건과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얽혀 희생당한 김용현씨가 1942년 일본 도쿄 철도학교에서 받은 졸업장. 김양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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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보안대에 끌려갔던 2월만 되면 매년 몸이 아파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국가폭력 피해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직 드러내지 못한 여순사건 희생자와 유족이 많아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잘 운영돼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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